누가 공포를 재생산 하는가?
국가보안법 철폐논쟁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철폐하자는 쪽이나 철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이나 문제의 본질을 내부에서 찾지 않고 외부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악법요소를 그 자체에서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당위성의 유무를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오던 역사적 과정의 외부영향에서, 즉 북한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철폐론자는 북한과의 관계가 많이 변했고 남북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은 필요없다고 한다. 냉전이 끝난지가 언젠대 아직도 냉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 반대로 존치론자들은 북한이 아직 노동당 규약을 바꾸지 않고 있으며, 남한에 대한 무력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우리만 무장해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쟁의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이 간직하고 있는 본질적 문제점은 자꾸 뒤로 물러난다.
북한과의 관계가 문제의 핵심의제로 떠오르자, 북한이라는 존재 덕에 밥을 먹고 살았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높아간다. 예를 들어 재향군인회, 성우회, 헌변 등등... 쿠데타 주역들에게 기생해서 일신의 안위를 보장받고 지금까지 호의호식하면서 이제는 원로노릇까지 해먹으려고 하는 이 인간들이 생존해왔던 방식은 다름 아닌 북한이라는 공포스러운 대상의 존재였다. 국민들에게 확산된 공포감을 이용해 요 자칭 원로들은 지들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거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공포의 재생산이다. 북한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의 현존. 그 현존은 단지 물리적 현존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정신적 현존, 즉 남한 국민의 뇌세포 속에 절대 지워지지 않을 각인으로 북한이라는 공포가 남게 되는 것. 그리하여 언제까지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을 때는 얼마든지 그 공포를 끄집어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갋잖게 원로노릇 하려는 늙은이들의 추한 욕구이다. 그 추한 욕구의 실상은 이렇다.
아름다운가? 저 꼴갑이?
이들과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들의 논리가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 자체가 허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들이 들고 나오는 논리에 대해 쌩까는 것이 필요하다. 국보법 폐지를 위해서는 보다 다른 이야기를, 북한이 소재로 이용되지 않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것이 보다 본질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보안법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인권+생활"의 관점에서 전개하자는 주장을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선생이 해왔다. 그리고 이번에 그 주장의 명확한 방법으로 장상환 교수가 의견을 내놓았다. 서준식 선생과 장상환 선생의 의견을 경청해볼만하다. 행인은 그 의견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북한이라는 존재를 피해서 국가보안법을 논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논의의 과정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두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활동하는 한 모임에서 이 문제가 잠깐 논의된 적이 있다. "왜 이제는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어야 하는가?"를 본격적으로 다루자는 주장에 대해 행인은 "왜 아직까지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지 않았는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이제는 북한과의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다는 것을 광범위하게 알려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행인은 북한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그 자체에서 문제를 찾자고 주장한 것이다.
자꾸 북한과의 관계가 전제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이렇다. 지금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있으므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면, 나중에 북한과의 관계가 경색되거나 혹은 북한과 일전을 벌여야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면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이 다시 나와도 된다는 논리가 된다. 아닌말로 남한에서 실험용이던 연구용이던 어쨌던 간에 우라늄 농축실험을 한 사실이 밝혀졌고, 북한은 강한 어조로 이를 비판하고 있다.
6자회담이 제대로 진행될지 여부가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더구나 러시아에의 테러사태로 인해 테러국가에 대한 경계심이 국제적으로 높아지는 상황이며 이미 북한은 미국 등에 의해 테러국가로 낙인찍혀있는 판국이다. 테러의 위험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남한의 수구세력들이 이를 좋은 빌미로 이용할 충분한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이야기가 국가보안법 철폐의 논거가 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어떤 공포가 존재했으나 이제는 그 공포가 사라졌으므로 그동안 그 공포스러운 존재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했던 무엇이 없어져도 좋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그러한 공포가 재발할 경우 그 공포에 대한 대응이 다시 필요하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논의 자체를 존재했던 무엇이 가지고 있던 문제가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지 않고, 그러한 문제거리의 빌미가 되었던 공포스러운 존재가 무엇이였던가를 다시 확인하는 차원으로 전락시킨다. 그리하여 공포물은 무한히 순환생성된다. 찬성을 하건 반대를 하건 어떤 포지션을 가지고 있더라도 공포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논의가 자꾸 혼란을 거듭하는 것이 바로 이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가운데 북한이라는 존재를 의도적으로 지워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장상환 선생이 지적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국가보안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착목하여 비판의 강도를 높여가야 한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국가보안법이 왜 악법이며 없어져야 하는가를 밝히는데 가장 필요한 작업이다.
북한문제가 거론되면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공포를 재론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한 번 웃어주면 되는 거다. 그리고 아직도 어릴 적 할머니의 귀신얘기를 들은 날 밤이면 화장실을 못가 울음을 터뜨리는 그 시절에서 한 치도 못벗어나고 있는 그 철딱서니들을 살짝 한번씩 꼬집어주면 되는 거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해보라고 설득을 해보는 거다. 허구헌날 "북한이 쳐들어오는 꿈 꿨어요. 그러니까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요. 국가보안법 살려주세요." 이렇게 징징거리지만 말고, 그거 아닌 다른 이야기도 좀 해보라고 다그쳐보는 거다. 백프로 장담하건데, 저 김용갑류 꼴통들은 뭔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입에 쌀과 엽전을 물게 될거다. "천냥이요, 이천냥이요... 천섬이요, 이천섬이요... 아이고~~ 아이고~~~"
형은 언제나 가려운데를 잘 긁어주시는군요. ^^; 글 퍼갑니다.
음 옳은 지적이고 또 그렇게 논의가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엠비씨 100분토론을 보았을때 느꼈던 갑갑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