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폭

행인[대~한민국 고등학생] 에 관련된 글.

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한국 우익들의 '역사특강'은 학업에 지친 고등학생들에게 잠깐의 취침시간을 마련해준다는 뜻있는 결실을 맺고 있다.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이 천금같은 시간에 오수를 즐긴다던지, 수업시간에 하기 힘들었던 모바일 게임을 한다던가, 혹은 고강한 내공으로 은신술을 활용해 강의장에서 빠져나가 친구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등 나름대로 "시간은 금"이라는 고귀한 잠언을 몸으로 실천한다.

 

이건 사실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상황인데, 지난번 포스팅에서 행인은 현재를 살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매우 상식적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다. 요즘 애들, 무섭다. 안면홍조증에 시달리고 있는 만수씨의 띨한 사고수준보다는 한국 고등학생들의 판단능력을 훨씬 더 믿을 수 있는 거다.

 

걱정되는 것은 학생들이 우익 노친네들의 무개념 강의를 듣고 넋을 놓아버릴까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러한 똑똑한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우익을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중도나 좌파 모두)은 뭘 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오마이뉴스 기사에 실린 한 학생의 말은 이런 걱정을 실감하게 한다. 이 똑똑한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늘은 보수적인 교수님 말씀 들어봤으니 다음번엔 진보적인 교수님 들어봤으면 좋겠고, 그 다음에는 중립적인 학자풍의 교수님 얘기도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이 교수님 얘기만 듣고 끝나면 우리한테 그 교수님 말만 옳다 이걸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죠.

 

멋지다. 장하다. 한국사회의 미래가 밝다. 문제는 이런 청소년의 바램을 들어줄 수 있는 방법이 어떻게 구사될 수 있을 것인가다. 물론, 중립적인 학자라는 건 없다는 것을 나중엔 알게 될 거고.

 

현실을 따져보면, 서울시 교육청과 더 나가서는 이 정권이, 그리고 그 뒷배로 한국의 족벌 자본이 버티고 있는 이번 '역사특강'급 규모로 다른 입장의 역사 강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의 체계적 지원과 각급학교의 협조, 더 나가 경제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예 힘든 것은 아니다. 아닌 말로 우익보다는 진보진영 혹은 좌파진영에 말빨 좋고 이름빨 날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들이 맘만 먹고 규합만 제대로 된다면 강사비는 큰 문제가 없을 거다. 장소야 뭐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나? 학교가 안 된다면 어디 길거리에서라도 특강을 하면 되지 않을까나? 더 생각해보자면, 온라인을 이용해 학생들 스스로 논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괜찮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잘 살렸으면 하는 바램이 큰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특강'이라는 것이 잘 하면 한국 우익의 자폭을 촉발하는 뇌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앞서 인용한 발언을 한 학생의 발언이다.

 

밖에선 이 특강이 시끄러운 것 같은데요, 일단 학생들은 여기 끌려와서 듣는 거예요. 솔직히 학생들 대다수는 관심이 많지 않고요. 다만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긴 했어요. 더 중요한 건 우리 고등학생들이 다 성숙해요. 바보가 아니에요. 우리도 우리 나름의 생각이 있고 가치관이 있거든요. 보수 교수 얘기 들으면 보수 되고, 진보 교수 얘기 들으면 진보 된다는 생각은 우리 학생들을 무시하는 거죠. 만약에 그거 걱정하시는 분들 계시면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되요.

 

다시 이야기하는 거지만, 멋지다. 장하다. 한국 사회의 미래가 밝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진보나 혹은 좌파가 우익의 '역사특강'에 대립하는 또다른 역사스페셜 강의를 기획한다고 해서 한국 고등학생들이 거기에 홀라당 빠져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우익의 '역사특강'이 자뻑이 될 거라고 예측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다. 다만, 그런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으면서 우파는 나쁜넘들이라고 백날 떠들어봐야 별반 소용이 없다는 것이고, 좌우의 이야기를 동시에 듣고싶어 하는 청소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도의 실력으로는 우익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다.

 

2mB의 삽질신공이나 안면홍조증에 시달리는 만수씨의 똘추짓 등과 더불어, 골수 우익들이 진행하고 있는 '역사특강'은 한국 우파의 자살골이다. 그 반대편에서 좌익은 뭘 하고 있을까나? 어쨌든 한국 중고등학생들에 대한 기대, 뭐 계속 이어가도 별로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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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8 18:50 2008/11/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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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만 생각해 보니...

    이번에 그 '특강'인지 뭐시긴지를 한다는 인간들이 "분단 안 됐으면 우린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 말하고 다닌다던데.. 이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 우익은 그 시절에 그렇게나 약했다"라는 자기 고백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특강'을 대놓고 한다는 건 "우린 지금도 (이런 억지 '특강'을 안 하면 안 될 정도로) 그렇게나 약하다"는 자기 고백이고..

    근데 일케 생각하면 "우익이 그 시절에 그리 약했던 이유가 뭐지?"라고 묻는다면, 이른바 '좌편향'이라는 내용들이 거의 '진실'이라 결론내리지 않으면 곤란하단 이야기니, 결국 이 '역사 특강'은 그 자체로 '좌편향' 교과서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디다요.^^

    그런 의미에서 행인님의 촌철살인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2. fessee/ 아이구, 이렇게 호출까지 넣어주시다니요. 제가 게을러서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ㅠㅠ

    한중일 3개국 공동으로 역사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도 어떨지 모르겠네요. ㅎㅎ

    삐딱선/ 아, 오랜만입니다. 간만에 오셔서 엄청난 비밀을 폭로해주셨네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보진 못했었는데, 역시 그런 측면에서 이번 역사특강은 우익의 자뻑이 분명할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