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21세기판 대동아 공영?

티비에 출연하는 예능인에게 대한 것과는 달리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은 일정한 방향을 가지나보다. 예능인을 폄하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예능인을 아직 접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글을 써서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선 버라이어티 쑈에서 재담으로 밥을 먹는 사람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 때 행인이 술로 낮을 보내고 술로 밤을 새우던 당시, 행인으로 하여금 참 많은 술을 마시게 만들었던 책을 쓴 사람의 일로 시끌벅적하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각하의 손을 잡고 순방한 이 작가는 '중도실용'이라는 "느슨한" 가치관의 실천을 위해 자신이 언젠가 그토록 능멸하던 정권의 핵심과 함께 했다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좌우 공히 이에 대해 비난을 쏟아놨고, 그에 때맞춰 이미 90년대 초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고 '생명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어떤 작가는 글쟁이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희안한 논리로 '중도실용'을 걷겠다는 동료 작가를 감싸고 돈다. 당연하지. 글쟁이는 자유로워야 한다. 다만, 글쟁이는 글로써 자유로워야 한다. 그 자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 가치관을 침해하는 자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영원히 글로써 가능하다.

황석영과 김지하의 이 수준 낮은 농담따먹기는 그래서 유치하다. 적어도 김지하가 황석영을 감싸고 돌려고 했으면 그의 글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그의 행보에 관련된 문제가 작금 설왕설래의 핵심임을 먼저 간파했어야 한다. 물론 지적능력이 뛰어난 축에 속하는 김지하가 그런 문제점을 놓쳤을리는 없을 거다. 그럼에도 김지하는 엉뚱한 이야기로 문제의 본지를 희석한다. 전형적인 물타기다. 생명운동은 물타기에서 시작한다?

이 즈음에 황광우는 아주 적절하게 문제의 핵심을 짚는다. 그는 이번 사태의 문제가 황석영의 "혀에 있지 않고 발에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문제는 그거다. 황석영이 중도실용을 하던 느슨한 꿈을 꾸건 간에 그건 황석영의 자유다. 하지만 머리를 당위에 두고 발은 현실에 둔다고 해서, 그 발이 아무 곳이나 현실로 인식하게 되면 곤란하다. 발 자체가 망상에 근거를 두면서 그걸 현실이라고 우기면 머리가 향하고 있는 당위라는 것은 그냥 장식으로 전락한다.

난리가 났다는 것을 인식해서인지 몰라도 황석영은 자기 블로그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라는 제목의 이 글은 차라리 아니 읽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링크는 걸겠지만, 절대 비추다) 문익환이며, 윤이상이며, 윤한봉을 회고하다가 급기야 몽양과 백범까지 거론하면서 하고자 한 바는 이거다. 원래 꼴통들은 거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김종필의 표현을 빌자면 홍곡의 대지를 연작이 어찌 알겠느냐, 뭐 이런 종류의 이야기다.

"이념을 벗어난 실사구시"라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이상적 몽상을 황석영은 "느슨한 꿈"이라고 한다. 행인의 이해능력이 떨어져서인지는 모르겠으되, 그건 "느슨한 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이 그동안 자신의 글을 통해 알려진 것과는 다른 것임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느슨한 꿈"의 한 축을 이루는 황석영의 거창한 웅지는 묘한 거부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 "느슨한 꿈"의 종착에는 "알타이 문화연합"이라는 신종 "북방정책"이 있다.

구구한 정황설명과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황석영의 알타이연합체 구상에서는 21세기판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구리구리한 냄세가 풍겨나온다. 그나마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이 황석영에 의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황석영이 탑승하고 싶어하는 '평화열차'는 고급스러운 문화기행 열차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름은 '평화열차'지만, 그 열차는 중앙아시아의 무한한 자원을 싣고 있음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일대를 아울렀다는 고대 한민족의 자부심으로 무장하고 물경 1억 2천에 달하는 소비주체를 향해 질주하는 새로운 시장질서의 구축체계다.

예의 글쟁이에게 느끼는 별다른 감정이라는 것이 황석영이라는 한 인물에 의해 깨져 나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를 두고 '변절'했다고 할 염도 별로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숙종조의 비적 장길산을 변혁의 이상으로 몸부림치는 영웅으로 승화시켰던 황석영과 이명박과 함께 21세기판 대동아 공영을 구상하는 황석영의 사이에서 겪어야 할 혼란은 당분간 이어질지 모르겠다. "오적" 시집 한 구석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는 동일인의 칼럼을 스크랩해서 간직하고 있는 행인은, 기억력이 거의 붕어의 수준에 도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사건에 대해선 꽤나 오랫동안 기억력을 발휘한다.

다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황석영이 더 이상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말고, 김지하의 '생명운동'의 뒤를 잇는 '중도실용' 운동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어디서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면 하는 거다. 그러나 이런 얄팍한 바램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황석영은 단호한 표현으로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마지막 사회봉사를 해볼 작정"임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 사회봉사 하지 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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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9 14:51 2009/05/1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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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게요; 나름(응?) 문학도인데... 완전 안습이에요 지금 사태는;; (뭐... 저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 끝이지만 ㅠ_ㅠ)

  2. 나이 먹어 가면 갑자기 사회봉사를 하고픈 맘이 생기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