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장으로

엠네스티와 국가인권위원회가 뭐라고 하건 간에, 잔디관리를 위해 선거에 출마한 오세훈은 잔디경비를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경찰청장 휘하 서울청장 등과 함께, 오늘도 대형버스 초정밀 밀착 주차의 신기술을 발휘하며 "국제적 자랑거리인 선진 폴리스라인", 즉 차벽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진행 예정인 모든 집회가 불법집회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정부의 신기(神氣)는 이 정부가 민주정부라기 보다는 신탁정부에 가깝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한다. 그 덕분에, 이 땅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시민들은 졸지에 신도(神徒)가 된다. 하긴 뭐 이미 천국에 봉헌된 땅,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애저녁에 천국을 살고 있는 영혼들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면도날조차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정밀하게 건축된 마추피추가 무색할 정도로, 역시 범퍼 사이로 종이 한 장 밀고 들어갈 틈도 없이 밀착주차된 호송버스들의 성벽 밖으로 무심한 하루가 흘러 간다. 광장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불변의 진리를 반추시키면서.

서울시청의 역할이 잔디관리로 축소된 오늘날, 소통의 부재니 표현의 억압이니 하는 말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오히려 더 부각되어야 하는 사실은 소통과 표현을 해야하는 주체, 즉 주권자로서의 인민이 주권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이다. 광장의 상실은 주권박탈의 상징이다. 집시법의 위헌성을 아무리 주장한들, 주권자체가 없는 노예들의 주장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 어차피 노예의 외침은 말 할 줄 아는 짐승의 울부짖음일 뿐, 인간의 그것으로 승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인식이 오늘 이 땅의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인식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루소였던가? "만일 신들로 이루어진 인민들이 있다면, 그 인민들은 민주정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정이라는 것은 그만큼 완전한 정치체제이니까. 거기에 덧붙인 말이 인상적이다. "이 체제는 인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당연히도 인간은 완전하지 않으므로.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른 역설을 불러온다. 신들로 이루어진 인민들이 있다면, 그 인민들은 어떠한 정치체제도 선택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들 자체가 완전하므로, 민주정과 같은 소통과 합의의 구조라는 것이 없이도 그들은 알아서 제 일을 다 할테니. 따라서 오히려 민주정이라는 체제는 인간에게 더욱 필요하다. 인간은 완전을 추구하는 존재이므로.

광장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의 시한부를 하루 하루 연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권을 박탈당했다는 상실감을 인민들이 느끼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 차벽에 둘러 싸여 있는 광장이 다른 측면에서는 일종의 전망으로 다가온다. 저들은 오늘 하루 광장을 막음으로써 내일 역시 광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저 광장이 내일도 막혀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박탈감으로 오늘 밤에 횃불을 들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가 괜히 칼을 들었겠는가?

광장을 되찾아 오기 위한 노력은, 이제 시작이다. 그 시작에, 비록 "대한민국어버이회"나 "재향군인회"의 노병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방해를 할지라도, 한 번 물꼬가 트인 이후, 물길이라는 것은 함부로 제어하기 어려워지는 법이다. 그리고 다시 광장이 우리의 발을 허락할 때, 민주정이라는 "신들의 체제"를 향한 지난한 여정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횃대를 만지작 거리는 것은 오늘 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내일 아침을 위해서다.


<곁다리> 청계광장도 막았구나... 시설보호차원에서....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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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17:08 2009/06/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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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9/06/07 21:38

    행인님의 [다시 광장으로] 에 관련된 글. 그러고 보니 나도 서울특별한시로 주소이전 하는 바람에 얼렁뚱땅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되었네. 참 여러가지로 신을 모독하는 이명박. 니가 하나님 나라 대한민국 지부장이라도 되냐? 어제 현충일, 날씨 맑음. 거리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인사동에서 삼청동 길은 놀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차서 인도에서 밀려나 side-sidewalking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차벽을 치운 서

  1. 광장이라는 단어가 정치/사회적으로 가지는 의미 때문에 '서울광장 봉쇄'라는 짧은 문구는 현 정권의 많은 것을 함축한다고 생각합니다. 답답하네요..

    • 차벽에 불지르러 가려고 했더니 그새 차벽을 치웠더군요. ^^;;;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죠. 지금 정권의 상황이 딱 그 수준인 듯 싶습니다. 하지만 고양이가 놀라 달아나지만 않는다면, 결국 쥐는 잡히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