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굿
망자를 가슴에 묻는 사람들이 애도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해줄 수 있다. 그들을 비난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반면에 내가 어떤 이를 추모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들에게 이유가 있는 것만큼 나에게도 이유라는 것이 있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충격은 있었을지언정 그를 추모할 수는 없다. 혹자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구분해서 보자고 하지만, 도량이 좁아서인지 그렇게 구분하는 의미도 모르겠고 굳이 그렇게 구분해보고자 노력할 의향도 없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그의 분향소를 찾은 이들을 숫자로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저 많이들 왔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들은 영정 앞에 담배 한 개피씩을 놓았고, 눈물을 흘렸고, 살아 생전 고인에게 못다한 절절한 사모곡을 목놓아 부르짖었다.
그렇게 해서 해원은 이루어졌는가? "우리 모두"를 외치는 그들은 "못다한 그의 꿈"을 이어 받아 "바보"가 되고자 작정했는가? 혹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우리" 역시 새로운 "바보"가 되고자 결의를 다졌는가?
넘쳐나는 뉴스 속보 속에서 감정은 격랑처럼 몰아쳤지만 이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진보블로거를 비롯한 몇 몇 집단과 사람 사이에서 보여진 그에 대한 공과의 판단은 가슴을 부여쥐며 절규했던 사람들이 볼 때는 아마도 냉철함을 넘어 비정함마저 느끼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의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2007년 연말까지, "노무현 씹기"라는 대중적 유희에 휩쓸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길래, 오늘 이 순간까지 그에 대한 연모와 회한이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넘쳐나는 걸까?
비통의 마음이야 그렇다고 쳐도, 죽은이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기 감정에 북받친 행태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그동안 그를 궁지로 몰아놓았던 분위기 속에서 함께 한 마디씩을 보탰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그를 애도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야 한다.
첫째는 오로지 감수성에 의존하는 것. 이 단계에서, 이라크 파병을 단행하고, 군비확장에 열을 올리고, 한미 FTA를 추진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광장을 폐쇄하고, 온라인을 봉쇄하고, 대추리를 전쟁터로 만들고, 교육환경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과오에 대해선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정치적 과오들을 언급하는 순간, 추모의 정은 계속 이어질 수 없으며,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한 회개는 더 이상의 신성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통탄과 비련의 감정을 한껏 드러낸 얼굴로 사람들은 "노짱"과 "노간지"를 이야기할 뿐이다. "진정성은 이해할 수 있었다"는 둥, "역할분담"을 했었던 것이라든 둥, 더 나가서 그를 "민중의 대통령"으로 추앙하는 데까지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식이 동원된다. 바로 공적을 만들어 내는 것. 대중의 감수성을 일정한 편향으로 조직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식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 공적이 너무나 선연하게 눈에 띈다. 다름 아니라 이명박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살인"이라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 구술된다. 노무현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되었다. 누구에 의해서? 바로 이명박에 의해서. 무엇때문에? 정치보복때문에. 이 선명한 도식. 추모의 감정은 분노로 바뀌고, 이 감정의 전환 아래서 한 때 그를 씹었던 자신의 행위는 감추어진다.
이중잣대라는 것은 여지없이 매 순간 손에 들려진다. 영결식장에서 표정관리조차 못하는 현직 대통령과 시시때때로 말 관리를 못하던 전직 대통령에 대한 판단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이 잣대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다시 질문. 그리하여 해원은 이루어졌는가? 이 넘쳐나는 군중들의 파도가 한판 걸진 해원굿으로 끝나는 정도라면, 글쎄, 더 이상의 기대는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이 비관적 의구심은 그러나 점점 현실이 되어갈 듯 하다. "노짱"이 가는 길에 모였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영결시 당일 새벽에 벌어진 용산침탈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불법증여를 통해 이루어진 삼성의 대물림에 대해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하던 삼성 애니콜은 여전히 잘 팔릴 것이다. 신영철은 건재하고, 그가 법복을 벗더라도 변호사로서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결식장에서 이명박에게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던 간에,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높이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돈 30원때문에 사람 목숨이 사라진다고 한들, 광장에 몇 십만명이 국화를 들고 나오겠는가?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이 땅은 여전히 숱한 원혼들의 비통함으로 젖어 있다. 노무현의 사망 소식에 일단의 충격을 받았고,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심정을 생각하며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 이전에, 적어도 누릴만큼 누리고 간 사람보다는, 최소한 살아갈 수 있기를 염원하다 간 사람들에게 더 큰 연민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살아가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여린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입장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내가 가진 상식이 이 사회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진짜 해원을 이루는 걸진 굿판은 언제쯤이나 가능할 것인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충격은 있었을지언정 그를 추모할 수는 없다. 혹자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구분해서 보자고 하지만, 도량이 좁아서인지 그렇게 구분하는 의미도 모르겠고 굳이 그렇게 구분해보고자 노력할 의향도 없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그의 분향소를 찾은 이들을 숫자로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저 많이들 왔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들은 영정 앞에 담배 한 개피씩을 놓았고, 눈물을 흘렸고, 살아 생전 고인에게 못다한 절절한 사모곡을 목놓아 부르짖었다.
그렇게 해서 해원은 이루어졌는가? "우리 모두"를 외치는 그들은 "못다한 그의 꿈"을 이어 받아 "바보"가 되고자 작정했는가? 혹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우리" 역시 새로운 "바보"가 되고자 결의를 다졌는가?
넘쳐나는 뉴스 속보 속에서 감정은 격랑처럼 몰아쳤지만 이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진보블로거를 비롯한 몇 몇 집단과 사람 사이에서 보여진 그에 대한 공과의 판단은 가슴을 부여쥐며 절규했던 사람들이 볼 때는 아마도 냉철함을 넘어 비정함마저 느끼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의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2007년 연말까지, "노무현 씹기"라는 대중적 유희에 휩쓸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길래, 오늘 이 순간까지 그에 대한 연모와 회한이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넘쳐나는 걸까?
비통의 마음이야 그렇다고 쳐도, 죽은이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기 감정에 북받친 행태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그동안 그를 궁지로 몰아놓았던 분위기 속에서 함께 한 마디씩을 보탰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그를 애도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야 한다.
첫째는 오로지 감수성에 의존하는 것. 이 단계에서, 이라크 파병을 단행하고, 군비확장에 열을 올리고, 한미 FTA를 추진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광장을 폐쇄하고, 온라인을 봉쇄하고, 대추리를 전쟁터로 만들고, 교육환경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과오에 대해선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정치적 과오들을 언급하는 순간, 추모의 정은 계속 이어질 수 없으며,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한 회개는 더 이상의 신성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통탄과 비련의 감정을 한껏 드러낸 얼굴로 사람들은 "노짱"과 "노간지"를 이야기할 뿐이다. "진정성은 이해할 수 있었다"는 둥, "역할분담"을 했었던 것이라든 둥, 더 나가서 그를 "민중의 대통령"으로 추앙하는 데까지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식이 동원된다. 바로 공적을 만들어 내는 것. 대중의 감수성을 일정한 편향으로 조직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식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 공적이 너무나 선연하게 눈에 띈다. 다름 아니라 이명박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살인"이라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 구술된다. 노무현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되었다. 누구에 의해서? 바로 이명박에 의해서. 무엇때문에? 정치보복때문에. 이 선명한 도식. 추모의 감정은 분노로 바뀌고, 이 감정의 전환 아래서 한 때 그를 씹었던 자신의 행위는 감추어진다.
이중잣대라는 것은 여지없이 매 순간 손에 들려진다. 영결식장에서 표정관리조차 못하는 현직 대통령과 시시때때로 말 관리를 못하던 전직 대통령에 대한 판단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이 잣대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다시 질문. 그리하여 해원은 이루어졌는가? 이 넘쳐나는 군중들의 파도가 한판 걸진 해원굿으로 끝나는 정도라면, 글쎄, 더 이상의 기대는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이 비관적 의구심은 그러나 점점 현실이 되어갈 듯 하다. "노짱"이 가는 길에 모였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영결시 당일 새벽에 벌어진 용산침탈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불법증여를 통해 이루어진 삼성의 대물림에 대해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하던 삼성 애니콜은 여전히 잘 팔릴 것이다. 신영철은 건재하고, 그가 법복을 벗더라도 변호사로서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결식장에서 이명박에게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던 간에,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높이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돈 30원때문에 사람 목숨이 사라진다고 한들, 광장에 몇 십만명이 국화를 들고 나오겠는가?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이 땅은 여전히 숱한 원혼들의 비통함으로 젖어 있다. 노무현의 사망 소식에 일단의 충격을 받았고,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심정을 생각하며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 이전에, 적어도 누릴만큼 누리고 간 사람보다는, 최소한 살아갈 수 있기를 염원하다 간 사람들에게 더 큰 연민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살아가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여린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입장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내가 가진 상식이 이 사회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진짜 해원을 이루는 걸진 굿판은 언제쯤이나 가능할 것인가?
후배들한테 운동권은 잔인하다, 인정머리 없다... 는 소릴 요즘에 싸잡아서 듣고 있어요 ㅠ_ㅠ 으하하하;; 그럴 수 있지요 ㅠ_ㅠ;;
"인정"이 가야할 곳이 서로 다른지도 모르겠습니다.
21th century schizoid man
헉... 저에게 하시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ㅠㅠ
노무현은 "국민(서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라는 '진정성'을 가지고 파병도 하고, 한미FTA도 했다고 말해야겠죠.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만 '바보 노무현'이 아니라, 대통령이 된 후에도 '바보 노무현'이었다고 말해야겠죠.
그리고 '바보 노무현'은 '타살'당한 건 맞겠지요. 그런데 '타살'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걸 깊이 파고들어가면.. 우리는 '살인자'도 '피살자'도 알고 보니 둘 다 '살인범'이었더라 하는 진실과 마주치게 될 테구요.
이미 그 '진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 '진실'이 불편할 뿐이고, 그 '진실'을 현실에 대한 분노 혹은 연민으로 돌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요즘 바빠서 인터넷 거의 안하고 있는데, 요즘 너무 갑갑해서 진보블로그에 가끔 들어오고 있어요. 신문과 방송은 물론이고 인터넷에서조차 제정신인 글 들이 많지 않아서리... 진보넷 오면 그래도 아직 제정신인 사람들이 꽤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래봐야 아직은 너무 소수구나라는 우울함이 함께 오네요. ^^;;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나에 대해 아내는 굉장히 섭섭해하는데,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해서 거짓으로 슬퍼할 수도 없고 참나...
어느 죽음인들 슬프지 않은 죽음이 있겠습니까... 그 슬픔이 빠져나갈 구멍이 보여야 하는데 그게 보이질 않으니까 더 슬프네요.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 전국이 노란색으로 도배할때 용산 길거리 문신부님만 생각나더이다.
ㅜㅜ
어제 친노 성향이 있는 친구와 얘기를 했는데,
노무현에 대해서 조금만 쓴소리를 해도 엄청나게 화를 내더군요.
그만큼 서민을 위한 정책을 세운 사람이 있었나, 그리고 그는 원래
보수 정치가였기 때문에 한미 FTA나 평택 대추리 사건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그 친구의 의견이었죠.
무엇보다 노무현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살했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말도 하더라구요.
하, 뭐라고 해야할지, 노무현은 정말 신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보수 진영은 박정희, 이른바 개혁진보 진영은 노무현을 계속해서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기는 그런 시대가 몇십 년 동안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답답한 노릇이긴 한데, 그걸 돌파할 수 있는 방법도 안 떠오릅니다.
민노당 강기갑 대표는 '책임질 사람이 따로 있다'는, 그야말로 민주당 대표가 해야 할 말을 자기가 함으로써 스스로 '민주당 2중대'임을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구요.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게 되면,
결국 친노세력의 부활(유시민, 안희정, 이광재 등),
이른바 진보개혁 진영의 민주당 또는 친노세력으로의 집중에 대한 강력한 요구,
'민주-반민주' 전선을 연상시키는 반-이명박 전선의 형성 등이 떠오르네요.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의 반복 내지는 퇴보가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신화는 시간이 흘러감과 더불어 강고해집니다. 그보다 문제는 반이명박 전선이 구축된다고 한들, 그 내용이 뭘로 채워지느냐겠죠. 지금 보이는 바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반 이명박 전선이라는 것은 그저 한 번 뭉치자 정도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뉴민주당 플랜은 말 그대로 이명박 따라하기 수준이고, 진보정당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도 그닥 선명하지 못한 상황인 듯 합니다. 자칫하면 이승만 하야 직전의 사태나 5공 붕괴 직전의 상황처럼 많이 죽고 다치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지 우려되구요.
균형이 느껴지는 글 감사히 읽고 가요)
감사합니다.
노무현의 죽음이 슬프지는 않았는데 안타깝기는 하더라구요. 그리고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인권변호사 시절의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가 노무현을 포함하여 정치인 노무현'들'의 공과를 따져가면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분해 볼 수는 없을까에 꽤 많은 생각을 했었구요. 그러나 행인님을 포함한 몇 몇 분들의 글을 읽다보니 그런 분리의 노력이 (그런 분리를 성공적으로 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저의 경우에는) MBC에서 노무현의 과거와 현재를 줄기차게 방송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될 공산이 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오늘도 행인님 글에서 좋은 생각을 배우고 갑니다(^-^). 아아- 쪽팔려(^-^;)-
공과 과를 나누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일은 이제 시작될 겁니다. 공과 과를 분명히 구분하고 그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이루어질 때 전진할 수 있겠죠. 다만, 감성에 파묻혀 이 과정을 수년 혹은 수십년 뒤로 미루어버린다면, 오히려 그것은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의 이름을 하루 속히 지워버리려고 획책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올까봐 걱정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것이야 뭐 다른 분들이 얼마든지 하고 계시니 저는 그저 잠깐이나마 감정을 좀 다듬어봐야하지 않을까 싶은 심정을 올린 거구요. 종종 찾아뵐께요.
행인님의 글이라도 읽으니, 마음 한구석이 편안합니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