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위하여

망국의 목전에서 그나마 실추된 자존심을 호칭으로라도 달래보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으되, 어쨌던 조선의 고종은 왕이 아닌 황제였다. 왕이 아닌 황제로서의 삶은 더 행복했을까?

 

그 격을 감히 유추해보기도 어렵지만, 황제는 지존인 것. 가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속세의 삶에서만큼은 황제에게 적용될 것이 적당하리라. 하지만 어디 황제라고 나날이 복에 겨운 시간만 보냈으랴.

 

국정이라는 것이 본래 어려운 것이어서, 국경 밖의 동이서융남만북적, 이 야만인들을 다루어야 하는 것은 물론, 호시탐탐 지존의 자리를 엿보는 왕후장상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살펴야 하는데다가, 뭔놈의 사건사고는 끊이질 않아 추상같은 처분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할뿐더러, 만백성의 삶이 풍요롭고 넉넉하도록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것은 기본.

 

이걸 잘 하면 요순이요 못하면 걸주라...

 

어디 그뿐이랴, 구중궁궐 그 도처암중의 세계에서 황후 살피랴 후궁들 달래랴, 지 새끼들이 하도 많아 왕자, 공주 이름 외우기도 바쁘려니와 혹시나 딴짓하는 내시들 없을까 시시때때로 내시들 거시기 검사까지 해야했을 터. 어우 씨...

 

이쯤 되면 차라리 황제 때려 치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나물 캐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드러누워 속세에 대한 미련을 한 점 구름에 실어보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만은,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인가.

 

하긴 뭐 황제라는 직위에 앉은 자가 온갖 일을 지 혼자서 다할리는 없을 테니,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황제 아래 부리는 권속이며 최말단 일용잡급직 일꾼까지 말 한마디면 필요한 거 다 해주었을 터이니 그닥 힘들 것도 없었으려나??

 

1박 2일 무모한 도전, 최저생계비로 하루 나기를 한 차명진이라는 현직 국회의원이 불과 6300원으로 황제같은 생활을 했다고 자랑질을 해서 화제다. 천하에 날고 긴다는 반짝반짝 전두환도 29만원은 있어야 생계유지가 가능한 21세기에 기껏 6300원으로 황제처럼 지냈다고 설레발이 치는 차명진은 확실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1000원 남짓한 돈을 남겨 사회봉사에도 활용했으니 참으로 훌륭한 의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의원이 하는 자랑질이 없는 사람들에게 염장질로 다가오는 건 뭇 소인잡배들의 심사가 만수산 드렁칡이 얽히고 꼬이듯 해서일까나. 한 끼를 먹어도 단백질 섭취에 신경을 쓰시는 그분은 참치캔과 미트볼은 드셨어도 한국사람들이 삼시 세끼 젓가락질을 해야 하는 김치는 안 드셨더라. 요즘 김치값이 금값인 것을 감안할 때, 매우 적절한 식단마련이라고 칭찬할 수도 있겠으나, 그럴 걸 뭐하러 '체험'까지 하시고 난린가? 집구석에서 갈비나 구워 뜯지.

 

훌륭하신 사모님의 헌신적 내조 덕분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최저가격 비교까지 하신 정보를 바탕으로 동네 구멍가게도 아닌 마트에서 세일가격에 식재료를 구입한 차명진 의원. 사실 그걸 뭐 인터넷 검색까지 하고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라면 세 봉지 달랑 사면 그걸로 끝날 수도 있었을 터. 예전에 어떤 기사에서 쪽방살이 하면서 한 끼에 라면 반봉지로 허기를 달래던 어떤 노인네 이야기도 봤는데, 차명진도 그렇게 했으면 6300원에서 4000원 이상은 남길 수 있었겠다.

 

아무리 봐도 차명진은 안분지족의 삶을 황제의 삶으로 비유한 것은 아닌 듯 싶은데, 그렇다면 결국 차명진의 의도는 하루 6300원으로도 포식하면서 살 수 있음에도, 이걸 모자라다고 징징거리는 것들은 생각도 없고 발품 팔 부지런함도 없는 기생충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픈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기회에 차명진의원은 고달프고 신경쓰이는 의원직을 때려치고 인터넷 검색하는 부인과 함께 쪽방에서 하루 6300원씩 쓰면서 황제같은 여생을 보내는 것도 바람직할 듯 하다. 당연히 세비는 물론이려니와 기타 수익 일체는 사회에 환원하고. 그렇게 하신다면, 내 지금부터 열심히 돈을 벌어 차명진 의원과 그 부인이 한달 동안 살기 위해 필요한 최저생계비를 평생 조달하도록 하겠다. 단, 그 돈 이상 쓰면 안 된다. 황제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비용은 절대 외부조달하면 안 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당연히 그 돈의 지불항목에는 쪽방의 월세며 전기세 수도세, 주민등록 되어 있을 경우 주민세 등등까지 다 포함된다.

 

말이라는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다. 그래서 세상의 장삼이사는 물론 장터의 시정잡배도 경우에 따라 쓸 말과 쓰지 않아야 할 말을 고르고 가린다. 그거 가리는 능력이 없으면 도처에서 얻어먹는 것이 욕이다. 가끔은 주어 터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선 연장이 신체 이곳 저곳을 드나들기도 한다. 하물며 구라로 돈벌이 하는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는 것은 기본능력일 것. 그거 구분하지 못하는 차명진 의원같은 사람이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멋있는 나라다. 개나 소나 국회의원 할 수 있는 나라, 이거 아주 위대한 나라 아닌가?

 

쪽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거기서 살며,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황제 운운하는 발언을 저토록 자랑스럽게 할 수는 없을 거다. 체험은 체험일 뿐이다. 매년 여름에 해병대 체험이 유행하는데, 하긴 뭐 이런 미친짓도 없지만, 그 며칠 달랑 내무반 생활 해보고 해병대 생활을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는 거다. 차명진 손에 쥐어준 6300원이 그나마 식비로만 쓰일 수 있는 쪽방 생활자도 있겠으나,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어떤 노인네가 그 돈 중에 절반 이상을 파스값으로 써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차명진은 아마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쨌든 결론을 내리자면, 내 평소 소신이기도 하거니와, 이 땅에서, 이 지구에서 황제들은 씨를 발라야 한다. 가끔은 루이 16세의 목을 절단한 프랑스의 인민들이 부럽기도 한 이유다. 황제 한 명을 부양하기 위해 도대체 몇 수십, 수백만의 인민들이 고혈을 짜내야 했단 말인가? 그런 차원에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6300원으로 하루를 버티면서 황제티를 철철 흘리는 자 역시 내가 볼 땐 적출의 대상일 뿐이다. 일당 6300원짜리 황제도 황제는 황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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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7 12:55 2010/07/2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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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게 웃기는게 차명진은 수구꼴통 출신이 아니라, 무려 운동권 출신이거든요. 서노련 중앙위원으로 김문수, 심상정 등과 같이 서노련의 핵심이었지요. '변절'이라기보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서노련 등 소위 80년대 운동권이 사이비였던 거지요. 말로만 사회주의 어쩌고 했을 뿐 실제로는 선민의식에 가득찬 엘리트주의가 이른바 386들의 본질인 듯...

    • 당시의 고민을 현재의 잣대로 잴 수는 없겠습니다. 더불어, 386이라는 단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저로서는 인정하지 않는 추상적 주체들의 본질까지 확인할 방법이 없네요. ㅎㅎ

      다만, 출신이 "수구꼴통"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수구"의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꼴통"의 경지쯤 된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