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팔이'도 정도껏 해야
1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중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단어가 ‘경제’라는 분석이 있었다. 한 언론사의 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회견 전 과정에서 ‘경제’라는 단어를 51회 사용했다고 한다. 단어출현의 빈도에 따라 일정한 성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따른다면 단연 대통령의 관심이 경제에 꽂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국민’이었다. 빈도만으로 따지자면 박 대통령의 머릿속은 온통 국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갸륵한 일이다.
하지만 국민이라는 대상은 정치적 대의의 명분인 동시에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정치는 국민이라는 저변에 대한 책임이어야 하지만 정치인은 흔히 자신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국민’을 이용한다. 그러다보니 정치인이 입에 달고 사는 말 중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국민’일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자나 깨나 국민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 국민생각이 책임에 대한 중압감인지 아니면 무책임의 전가를 위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최근 ‘국민’을 전면에 내걸고 진행되는 논란 중 하나가 정치개혁 논의다. 1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가동되는 국회의 정치개혁특위는 현재 지방선거 개혁방안을 놓고 설왕설래 중이다. 그리고 그 개혁방안의 한 가운데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 역시 국민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염두에 두고 현실의 개선방안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과 곤경을 전가할 대상으로 국민을 운운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재 각 정당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치개혁 방안은 아쉽게도 후자에 가깝다.
새누리당 구의회 폐지 주장은 위헌
간단히 각 정당이 제시하고 있는 ‘개혁방안’이라는 것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새누리당은 최근 △현행 3연임이 가능한 광역단체장 임기를 2연임으로 축소 △특별·광역시의 기초의회(구의회) 폐지 △광역단체장-교육감 러닝메이트제 또는 공동후보등록제를 들고 나왔다. 한편 민주당은 2013년 7월에 전당원 투표를 거쳐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당론으로 걸었다. 민주당은 당 내에서 선거구 획정, 결선투표제 도입, 비례대표 확대, 석패율제도 도입 등에 대한 논의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민주당의 경우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 외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개혁안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신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추진위원회는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여성명부제 도입, 정당기호 순위제 폐지 등의 개혁안을 들고 나왔다. 가장 주된 주장은 역시 지난 대선에서 각 후보들이 기초선거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기로 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다.
각 정당의 주장은 ‘국민’의 요구를 수렴하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다. 새누리당은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라는 대선 당시의 공약은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김학용 정책위 수석부의장)”에서 추진된다. 민주당 또한 마찬가지다. 기초선거 정당공천폐지를 주장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60~70%에 달하므로 반드시 이에 부응해야 한다(백재현 국회 정치개혁특위 간사)는 것이다. 새정치추진위원회 역시 “여야 정치권은 분명히 국민과 약속(송호창 새정추 소통위원장)”했으므로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새누리당의 안 중 기초의회 폐지안은 더 볼 필요도 없이 위헌이다. 현행 헌법 제118조 제1항은 “지방자치단체에 의회를 둔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에는 광역엔 둘 수 있고 기초엔 두지 않아도 된다는 단서가 전혀 없다. 지방자치단체가 구성된 곳에는 반드시 의회를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 조문의 의미다. 따라서 기초단체에 두어야 할 의회를 없앤다는 것은 헌법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다는 이야기다.
민주당과 새누리당 공히 내세우는 안은 기초선거에 정당공천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위헌이다. 헌법 제8조의 규정은 정당의 설립 및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특히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동조 제2항 후단)을 위한 모든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 안에는 선거에 정당의 이름을 걸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될 뿐만 아니라 정당으로서 책임정치를 하라는 의무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이 원칙은 이미 헌법재판소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가 있고, 특히 새누리당의 경우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문제로 당론채택을 주저하고 있을 정도다.
민주당과 새정치추진위 주장, 부족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아
재밌는 것은 민주당의 태도인데, 민주당은 2013년 7월에 전당원 투표를 통해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당론을 결정한 바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대선 당시 공약이었던 정당공천폐지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정당공천폐지로 인한 책임을 당원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문제는 이 투표가 당원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자당의 당원들에게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청하는 정당이 전 세계에 존재했는지 그 전거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결국 정당공천제폐지는 민주당의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새정치추진위원회는 양 당에 대해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수준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지난 대선에서 예비후보로 나섰던 안철수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 그런데 새정치추진위원회의 주장에는 정당공천제의 합리성이나 법적 위상과 같은 고민이 전혀 녹아 있지 않고 다만 공약이니 지키라는 것 이외의 별론이 없다. 다만 “국민 대다수가 요구하는 개혁방안”이라는 것만이 그 이유인데, 사실 이런 안을 두고 “개혁”을 운운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새누리당이 교육감선거를 실질적으로 폐지하고 광역지자체장 선거와 연동하자는 안을 낸 것이다. 민주당은 이를 두고 교육의 독립과 자치를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민주당의 비판처럼 교육감 선출이 지자체장의 선출에 종속되는 현상은 분명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헌법 제31조 제4항은 “교육의 자주성 · 전문성 ·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지자체장과의 런닝메이트 등으로 교육감을 묶어버리게 될 경우 자주성 및 정치적 중립성은 담보되기 어렵다.
반면 정당의 지원이나 지지를 완전 배제한 채 지금처럼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외관을 가지고 교육감 선거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즉 출마자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까지 교육감 선거를 돌이켜보면 정당들은 음으로 양으로 선거에 개입해왔고 외연의 형식은 그것을 진보냐 보수냐 하는 식으로 갈라왔을 뿐이다. 오히려 교육감 선거에서 정당이 명확하게 지지의사를 밝힐 수 있거나 혹은 정당출신임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방향일 수도 있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선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하는 기성 정치권
다른 사안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고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만으로 보자면 각 정당들의 주장에 뭔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새누리당은 위헌임을 뻔히 알 텐데 왜 기초의회 폐지를 주장할까? 유신헌법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유신헌법은 부칙 제10조에 “이 헌법에 의한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설마 새누리당의 복고취향이 유신헌법의 향수로 범벅이 돼서 ‘대박’이 터지기 전까지 의회고 뭐고 필요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새누리당에 있는 사람들의 두뇌가 다 새(鳥)누리 수준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면 민주당은 새누리당조차 내부에서 위헌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정당공천제 폐지를 주장할까? 단지 당론이라서? 자당의 당원들에게 스스로 권리를 박탈하도록 만들어놓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뒤로 물리기는 쑥스러우니까? 한편 새정치추진위원회는 개혁도 아닌 것을 개혁이라고 주장하면서 양당에게 공약지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새(新)정치를 기대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왜 자꾸 새(鳥)정치로 오인 받을 짓을 하는 걸까?
이들 모두가 ‘국민’을 앞에 걸고 자기 주장을 하고 있지만 실상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들의 머릿속에는 국민은 염두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새누리당이 기초의회폐지와 교육감 런닝메이트제를 운운하는 것은 그러한 안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들의 목적은 따로 있는데, 정당공천제 폐지 후 기초선거에서 자당에게 유리한 선거구도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기초의회선거를 소선거구제로 변형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민주당은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기초의회선거가 소선거구제로 바뀌게 되면 그나마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 다 날아가게 생긴 상황이다. 한편 새정치추진위원회는 이 와중에 자신들이 정당공천제 폐지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균열이 발생한 사각지대에서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도 작동하고 있다. 결국 ‘국민’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계산속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면피의 수단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국민을 이토록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국민의 알권리와 참정권을 봉쇄하고, 주권자인 국민에 의해 보장된 정당정치를 축소하는 행위를 정작 국민의 이름으로 진행하려 한다는 것은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특히 이들이 ‘국민’을 거론할 때 곧잘 원용하는 것이 바로 그동안 정당공천제 폐지를 끊임없이 주장했던 일부 시민단체들의 논리다.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은 이들 정당이 왜 그토록 시민단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을 알리바이 삼는 무능한 정당과 시민단체들
사실 한국사회에서 위임받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정작 책임을 지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이들 시민단체들이다. 실질적으로는 준 정당의 역할을 하면서도 정작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채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달성하기 위해 정당공천제 폐지를 주장하는 몇몇 단체들의 논리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등 정당공천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정당의 논리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나 이 단체들 또한 명분의 맨 앞머리에는 항상 ‘국민’이라는 단어를 놓아두고 있다.
‘국민’을 단지 정치적 알리바이의 원천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주권자로 대우하는 것은 정략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도의의 문제이다. 정당공천제 폐지를 보수정당들이 주장하고 진보정당들은 반대한다고 해서 좌우의 이념대립이 필요한 사안으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그건 갈등의 표면만을 바라본 결과다. 이건 정치라는 현상에 전제되어야 할 윤리의 문제다. 정당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게 이쪽 언저리의 상도덕이다.
그동안 기초의회차원에서 벌어졌던 그 말썽들이 문제라고 한다면 그 말썽들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누군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하지만 양당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 경우 정당공천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정당이 문제였다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들 정당의 시스템을 개혁하든가 아니면 정당을 그만 두던가 하면 될 일이지 엉뚱하게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겠다고 하면서 국민을 운운할 이유가 없다. 헌정치냐 새정치냐의 문제가 아니다.
결론은 간단하다. 정당의 구조를 개혁하고 유권자들에게 정당의 이름으로 선택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쓸 데 없이 정당공천제 폐지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국민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국민을 들러리로 만들고 있는 정치는 퇴출되어야 한다. 어차피 기초의회가 구성되고 활동을 하게 되면 거기서 새누리당에 친하냐 민주당에 친하냐 혹은 새정치추진위원회에 친하냐는 것을 두고 다 갈리게 되어 있고 유권자들은 그게 누군지 다 알게 되어 있다. 오래된 격언들이 이 경우 적실하게 적용된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해서 수박이 되는 게 아니고,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