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개헌하려면

할 일이 없어 무료하거나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지만 하기 싫을 때 보통 잡생각을 하게 된다. 할 일이 천지사방에 널려 있는 정치인들의 경우 해야 할 일을 하기 싫을 때 보통 딴 소리를 던져놓고 사람들의 정신을 빼놓으려 한다. 현안이 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곳에서 모종의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써먹는 주제가 바로 개헌이다.

불법 관권개입 선거를 통해 당선된 현직 대통령의 민주적 정통성이 부정되고 있지만 정작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여당은 특검조차 받을 생각이 없다. 관권선거로 당선된 것도 문제지만 그에 대한 철저한 후속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퇴진소리가 도처에서 나올 명분을 주고 있다. 철도파업을 폭력으로 분쇄시킴으로써 사유화(민영화)기조를 중단 없이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는데, 이건 사회적 합의 없으면 사유화 없다고 했던 공약의 파기이다. 여당은 초지일관 사회적 합의는 무시한 채 대통령의 말씀에 이리 몰려가고 저리 몰려간다.

 

정치 하기 싫으면 내놓는 카드 - 개헌론

야당은 맥없이 그 뒤를 쫓기에 바쁘다. NLL 관련 대통령 기록물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자중지란에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정치적으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다. 부정선거에 관해 기껏 특검연대를 출발시켜놓고도 정작 관철하지는 못하고, “대선 불복이냐?”는 정부 여당의 날선 공격에는 “그건 아니고….”라고 발을 뺀다. 사유화 논쟁이 벌어지자 겨우 한다는 게 “우리가 했던 사유화는 좋은 사유화, 너희가 하는 사유화는 나쁜 사유화” 이러고 있는 게 다다. 뭘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못하는 희한한 야당을 여론이 우습게 여기는 것을 자기들도 안다.

갈등이 강력하게 부딪치고 그러면서 해결의 단초를 찾아내고 그 해결의 방식을 사회적 합의로 도출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데 작금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들을 두루 살펴보면 뭐 하나 제대로 붙지도 못하고 풀지도 못하는 교착이 계속되고 있다. 서로 간에 의지는 없고 시늉만 남았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깊어지고 혐오도는 높아간다. 그래서 뭔가 그럴싸한 작품을 만들고 싶지만 그러자니 곤란하고 불편하다. 이 상황에서 여야 공히 꺼내든 카드가 개헌이다.

이재오 의원이 초지일관 개헌을 이야기하는 건 뭐 그럴 수 있다. 전부터 이재오 의원은 개헌론자의 선봉에 서 있었다. 4대강 녹조라떼를 녹색성장의 표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재오 의원은 개헌 역시 200년 앞을 보고 4대강 만들 듯이 밀어붙이고 싶은가보다. 민주당에서 개헌론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개헌약속을 했으니 공약을 지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새누리당의 의원인 강창희 국회의장이 얼씨구 하고 개헌에 동의하는 것 역시 재미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여론은 반응이 없고 대통령은 “개헌논의는 블랙홀”이라고 단칼에 자르고 있다.

 

87년 헌법이 가진 가치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개헌의 내용은 기껏해야 정부구조개편, 그중에서도 대통령제 개편에 관한 이야기로 한정되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 포인트 개헌’을 이야기한 이래 그다지 내용적인 면에서나 형식적인 면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대통령 4년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가 그 핵심이다. 물론 그런 문제를 검토하고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개헌논의는 질과 형식, 시기와 방법에서 모두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헌법도 법(法)인 이상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그런데 헌법은 국체의 실질을 규정하는 최상위법이기 때문에 단순히 정치인들의 당리당략에 따라 바꿀 수 있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주권자인 ‘국민’이 헌정체제에 대한 변화를 욕구하지 않는 한 헌법은 함부로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이 원칙이 지켜진 사례는 한국 헌정사에서 단 두 번에 불과하다. 바로 제2공화국 헌법과 현행 헌법인 87년 헌법이 그 사례이다. 실제로 그 외의 헌법은 유사헌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제정헌법이래 이 두 차례의 개헌을 빼고는 헌법이 고쳐지는 과정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87년 개헌은 민중 총궐기가 낳은 산물이다. 개헌은 없다며 호헌을 고집하던 전두환 정권을 향해 주권자인 ‘국민’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독재정권 끝장내고 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었다. 내용상의 문제점은 차치하더라도 그 발생의 과정을 보면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게 됨을 실증하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87년 헌법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불거지고 있는 개헌에 대해 주권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먼저 확인되어야 한다.

전두환이 호헌을 강요할 때 민중은 개헌을 요구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은 블랙홀”이라면서 일단 호헌의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기는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지금 헌법이 너무 좋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정치인들의 개헌논의가 자신들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아서이다. 대통령 중임되고 책임총리제가 실현되면 민중의 삶이 행복해질까?

개인적으로 현행 헌법이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이 4년 중임해서 8년 임기를 채웠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앞으로 임기가 4년만 남은 것이 아니라 7년을 더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뒷골을 뻐근하게 한다. 물론 5년이 아니라 4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가능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기왕 할 거 국회의원 특권부터 없애는 개헌으로

아무튼 그렇지만 개헌이 굳이 필요하다면 대통령 임기제 같은 것만 건드릴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사안들을 반드시 정비해야 할 일이다. 예컨대 국회의원 3선 금지 같은 거 해보자. 5선에 빛나는 이재오 의원처럼 4대강 쫓아다니며 자전거 투어로 화려한 경력을 쌓으신 분들은 앞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없애는 것은 어떨까? 헌법 제44조와 제45조를 삭제하는 거다. 또는 국회의원 세비를 아예 헌법사항으로 정해놓는 것은 어떨까? 지들 멋대로 법률의 근거도 없이 혈세를 착복하는 사례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게 말이다.

차라리 국회의원 전면 비례대표제를 헌법으로 규정하는 개헌을 한다면 찬성하겠다. 더불어 사법부의 완전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도 필요하다. 예컨대 대법관과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고 있는 현행 규정을 직선제로 바꿔버리는 건 어떨까? 감사원을 행정부에서 독립시키는 것도 필요하고 인권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명문화하자. 제119조 제1항의 경제주체에서 ‘기업’을 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기본권 조항의 주체를 ‘국민’이 아니라 ‘누구나’로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개헌을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지금 헌법이 가지고 있는 순기능을 최대한 살리고 역기능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런데 겨우 대통령제에 관련한 사항만을 두고 개헌을 운운해 봤자 그건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물론 현 정권 자체가 ‘블랙홀’인 상황에서 까짓 블랙홀 한 둘 쯤 더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헌이라는 중대사를 주권자들의 의사를 살핌 없이 정치권 몇몇의 입장으로 운운하는 것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이 했던 짓들과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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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16:57 2014/01/0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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