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규의 기본소득론에 대한 덧댐

장규형이 페이스북에서 ‘약한’ 기본소득의 문제를 거론했다. 아, 이거 페북 해당 글 공유하는 방법을 모르겄네... 암튼.

물론 나는 약하고 강하고 간에, 또는 그것을 기본소득이라고 하든 무슨 수당이라고 하든, 더 나가 사회임금이라고 하든 간에 이름이 뭐가 붙던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이 중요하므로. 줘서 좋으면 하는 거고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는 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새눌당이나 더민당 같은 보수정당들이 적어도 10년 안에 기본소득을 자기들의 주장으로 전유할 것이라고 본다. 아니 어쩌면 내년 대선에서 이 두 당이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소득을 들고 나올 가능성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장규형은 ‘약한’ 기본소득은 일종의 보조금일 뿐이고 ‘강한’ 기본소득이 되어야 ‘사회체제의 전환이나 변혁’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강한’ 기본소득이냐, ‘약한’ 기본소득이냐”의 문제는 사실 “도대체 얼마를 줘야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장규형의 태도는 기본소득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에릭 올린 라이트의 견해와 비교할 수 있다. 에릭 올린 라이트는 기본소득이 “계급 간 힘의 균형, 노동의 탈-상품화, 사회적 경제를 위한 잠재력 제고”라는 사회주의적 기획들의 세 가지 원칙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즉 “첫 번째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기본소득은 우쭐거릴 수준은 아니지만 남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살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즉, 그 급부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즉, 임노동자 생활을 안 하는 것]이 유의미한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두 번째 나는 이런 급부수준이, 노동자에게나 투자자에게나, 장기에 걸쳐 그 급부를 지속불가능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동기부여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할 것이다.”는 것이 그것이다.

에릭 올린 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었을 때에야 사회주의적 기획들의 세 가지 원칙에 기본소득이 기여할 것이다. 이 견해는 역으로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것이 기본소득이니 뭐니 이름을 뭘로 붙이든 간에 사회주의적 기획으로서 작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대체 얼마를 기본소득으로 줘야 하는가?

그런데 이러한 ‘기획’의 세 가지 원칙이 과연 기본소득으로 가능할까? 에릭 올린 라이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이 유의미한 선택지가 될” 상황과는 모순되지만, 기본소득을 한다고 해서 노동의욕이 줄지 않을 것이라는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은 내가 볼 때 맞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이라는 것은 어차피 생계의 하한선을 담보할 수 있는 수준일 테고, 사람들의 욕망은 절대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눌당이든 더민당이든 기본소득을 주자고 주장해도 하등 문제가 없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기본소득론자들의 희망사항과는 별개로 기본소득은 자본의 이해에 가장 충실하게 복무하는 제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기본소득은 재분배가 아니라 분배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때 분배의 책임주체가 바뀐다. 즉, 지금까지 분배의 주체는 자본이었다. 자본은 사회적인 고용의 의무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그것은 분배의 직접책임을 자신들이 져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분배를 위한 재원은 자신들이 제공할지라도 분배행위의 주체는 자신들이 아닌 국가로 전환된다. 따라서 자본은 돈을 내는 수준에서 임무를 완수하게 되고 국가는 분배행위를 직접 하는 당사자가 된다. 이 형식은 그대로 고용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이제 자본이 굳이 세상사람들 눈치 봐가면서 고용을 책임질 의무를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자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소비자이다. 그것도 생산과정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소비자. 시민은 이제 생산에 대한 욕구를 거세당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에릭 올린 라이트가 이야기하는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건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하는 걸까?

고용의 책임을 면탈하게 된 자본은 필요 최소한의 상태에서 고용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윤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본은 정규직을 아예 없애고, 파트타임 시간제를 늘려도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않게 된다. 어차피 상대적 욕망에 사로잡힌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소비역량을 늘리기 위해 기본소득 외의 가외수입이 필요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때그때 필요를 충당할 수 있는 만큼의 파트타임을 하게 된다. 상대적 욕망이 크면 투잡 쓰리잡 찾아 다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노동은 에릭 올린 라이트가 희망하는 것과 같은 집단적 차원에서 계급 간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역량을 잠식당한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기본소득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패키지다. 노동시간 단축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이것이 기본소득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상되는 바, 정규직을 아예 없애거나 단시간 노동이 늘어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원하지 않아도 개별 사업장에서의 노동시간은 대폭 단축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상대적 욕망의 크기에 따라 개별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 ‘패키지’라는 말처럼 위험한 말이 없다. 자본과 대립하는 장에서는 어느 하나를 버리더라도 어느 하나를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 만일 자본이 기본소득을 수용할 테니 고용유연화를 수용하라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이 과정에서 패키지라는 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약한’ 기본소득이냐 ‘강한’ 기본소득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이다. 또는 소비자의 위치로 고착되는 현상을 극복하고 생산과정 자체를 주체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노동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이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은 채 논의되는 기본소득을 새눌당이나 더민당이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본과의 대립이 일어날 가능성은커녕 오히려 자본의 이해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기본소득이야말로 자신들의 배후세력인 자본으로부터 욕먹지 않으면서도 대중들에게 뭔가 그럴싸한 떡고물을 뿌릴 수 있다는 표시를 할 수 있는데 왜 거부할 것인가?

기본소득이 국가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냐 약화하는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내 입장에서는 하등 실익 없는 논의이므로 패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4/25 17:56 2016/04/25 17:56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1444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서 댓글 남깁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따르면 노동 없이는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없을 텐데, 고용의 의무가 사라진 자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가요? 얘기되는 것처럼 "노동시장에서 탈출해도 생존이 가능할 정도의 충분한 기본소득"이라면, 잉여가치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경제체제를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 밖에 없고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게 된다. 라는 논리도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의견도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