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단상
내 앞에 두 권의 책이 놓여있다. 둘 다 고 이재영의 유고집이다.
"한국진보정당의 역사"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아마 97년 대선이 끝난 이듬해 초 날이 많이 추웠을 때였던 듯 하다. 휴학을 결정하고 짐을 빼려 학교에 들렸을 때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가 '정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연전의 대선을 경유하면서 정당활동에 대한 관심들이 생긴 것 같았다. 나야 뭐 당시 별 생각이 없었기에 심드렁하게 넘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휴학기간 중에도 그렇고 1년 후 복학을 했을 때도 그렇고 '정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 계속 들어왔고, 때론 지금 어떤 당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같이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들어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그 이야기를 꺼내고 계속 귓등에 속삭이던 놈이 누군지 얼핏 감이 잡히기도 한다.
어쨌든 상당한 기간 동안 정당은 별다른 감흥이 생기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민주노동당이 창당했고 주변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그때만해도 정당활동이 나의 본령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바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정당을 고민했던 건 철거촌 현장결합과 지문날인 반대운동을 하던 과정에서였다. 투쟁현장에 가고, 지문날인반대운동을 하면서 대중적 확장력을 확보하는 방법과 결실로서의 제도화라는 부분에 고민이 집중되었다. 사회운동이 가지고 있는 힘도 힘이지만, 결국 이것이 제도화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더불어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지역을 고민하게 될 때 기댈 수 있는 것은 정당이 유력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당원이 되었고, 페이퍼당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어영부영 정책연구원이 되었고, 흘러흘러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 운동의 경험도 일천하고 공부도 그다지 깊이 하지 못한 처지임에도 나름의 소명이 있었고, 그래서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했다. 정당활동은 나를 키웠고, 사람으로 만들었다. 고백컨대 만일 내가 늦으막히라도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거나, 철들 즈음에 민주노동당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전히 개마초에 쌩양아치로 남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변한다는 걸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내 30대 이후 십 여년의 시간을 내몸처럼 생각했던 당이, 정당운동이, 진보좌파정당운동이 바닥을 모른 채 내려앉고 있다. 이건 사회적, 제도적, 문화적, 경제적인 외적요소가 매우 불리하게 작동하는 구조적 한계때문이기도 하지만, 활로에 대한 모색을 변변히 해나가지 못하는 진보좌파정당 자체의 무능력에서도 기인하는 현상임을 변명할 방도가 없다. 더구나 그 안의 한 일부였던 내 자신의 변변찮음도 한 몫 했고.
총선에서 노동당은 0.375%라는 궤멸적인 성적표를 손에 들었다. 선거 이전부터 위기감을 이처럼 심각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이전에는 누가 위기가 어쩌구 할 때마다 우리에게 언제는 위기가 아니었느냐며 힐난하던 입장에서, 이번에는 생각만 해도 몸이 오돌오돌 떨리는 두려움을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성적표 자체가 위기 중의 위기임을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저 0.375%라는 수치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다. 심각한 문제는 소위 진보좌파정당운동을 하는 주변의 '동지'들의 모습에서 별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제도권 정당운동을 한 이유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제도화를 통한 체제변혁, 그 체제변혁을 위한 수권, 그리고 수권의 과정에서 선출직 공직자의 배출. 내가 바라는 세상은 평등한 세상이고,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누구나 자유로운 세상이었다. 그것을 한 번에 이루고자 했다면 차라리 혁명지하조직을 했을 것이고, 그것이 현생에 이루어질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사이비 종교집단에라도 들어갔겠지. 하지만 난 혁명을 버린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의 혁명을 원했고, 한 번에 모든 걸 갈아 엎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과 보폭을 맞추면서 바꾸어나가길 원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생각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에 깊이를 더해줬던 사람이 재영이형이었다. 너무 빨리 곁을 떠났지만, 언제나 뭔가 막힐 때마다 재영이형의 글들을 보면서 생각을 가다듬게 된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줬던 장본인이기도 하고.
어제밤 늦게, 재영이형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나보다도 먼저 진보정당운동을 했던 '동지' 하나가 탈당한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직 답문자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기에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정당정치를 종교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치열하게 싸워왔던 사람이 떠나간다. 나는 어찌해야 할까. 어쩌면 나는 그저 한 여름 밤의 꿈을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여기서 어느 쪽을 한 발을 내디뎌야 하나.
낮이 길어지고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은 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