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린 욕망에 대한 짜증남

차비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수업조교 비스무리한 것을 하고 있는데, 기말이 되면 성적처리까지 해야 하는 일이다. 지난번까지는 그럭저럭 무리 없이 성적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번 학기에는 이의신청이 제법 들어온다.

성적이 마음에 기껍지 않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겠다만, 실상 들여다보면 그 이유라는 게 별 거 없다. 그저 난 열심히 했는데 왜 그러냐, 그거 소숫점 몇 점 올려주면 그만인데 그걸 못해주나? 뭐 이런 등등. 그러면서 수업에 대한 불만을 열심히 쏟아놓기도 하고 행정처리의 미숙함에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

기실 그들에게 부여했던 기존의 점수라는 건 거저 준 것이나 마찬가지. 학부도 아니고 대학원 수업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어떤 내용을 나중에 책 보고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는가 정도로 판단할 수는 없다. 최소한 사안에 대하여 판단할 능력이 있는지, 주어진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지, 자신의 의사를 세울 수 있는지 등을 판단하여 학업성취의 정도를 확인해 주는 것이 대학원의 성적 부여 아닐까 싶다. 이러한 일정한 기준을 놓고 판단하자면, 원래는 이들에게 그렇게 후한 점수를 줘서는 안 된다. 

이 일을 하면서 느낀 건, 학점 인플레가 너무 과하다는 것. 솔직히 내가 이 과목의 교수고 내가 이 학생들을 평가한다면 난 이들 중 거의 대부분에게 학점을 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학생들의 상황이 있고 여러가지로 고려할 정황적 맥락들이 있는만큼 그런 부분을 십분 감안하여 학점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 역시도 기준이라는 것이 자의적으로 변용되는 일이니 좋은 일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어쨌든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와는 달리, 이의신청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준을 자신의 주관적 관점으로 판단할 능력조차 갖추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자신들의 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과 숙고라는 걸 하는 사람들이 아닌 듯 싶다. 그런데 또 이런 자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기준을 고수하면 당장 여론재판이 벌어진다. 교육을 하고 평가를 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 따라 성적이 좌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무슨 학문을 하겠다고 대학원을 다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건 교수와 본인의 견해차이의 문제도 아니고 학문적 방향의 차이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저 난 좋은 성적을 받아야 되는데 왜 안 주느냐로 가면 어쩌란 말인가? 이들에게 계속 좋은 학점을 주고 학위를 줘서 공부 좀 했다는 근거를 남겨주는 것에 머무는 게 교육일까? 왜 이따위 일들이 해해년년 반복되는 것일까?

게다가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면, 이의 신청했더니 올려주더라는 관행이 자리잡게 되는데, 아니 그렇다면 이의신청 하지 않고 주는 성적에 그냥 만족하는 다른 학생들은 천치머저리인가? 뭐 이런 개뼉다구 같은 일이...

욕망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그 질과 양이 다르고, 욕망을 만족하는 방법 또한 그 질과 양이 천차만별이겠다. 그리고 어떤 객관적 기준이 있어 어떤 욕망은 옳고 어떤 욕망은 그른지를 판단하기는 상당히 어렵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따위 수준의 욕망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그 관계에 얼킨 수많은 다른 관계를 점차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자기 욕망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솟구치는 짜증을 감당하기 어렵다.

아요, 없는 살림 눈물겨워 차비라도 벌어보겠다고 했던 일이지만, 이거 다음 학기부터는 그만 두련다. 미련 없이. 차라리 손가락을 빨며 걸어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8/12/22 12:51 2018/12/22 12:51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