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넘...
* 이 글은 미갱님의 [이런 상사는 안돼요]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원래 그 인간하고 행인은 같은 현장 '공돌이'였다. 둘 다 공고를 나왔고, 그 인간은 행인이 입사하기 7년 전에, 행인은 그 인간이 입사한 후 7년 후에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 처음 그 인간은 생산과에 있었고, 행인은 기술실에 있었다. 군복무 후 복직을 하자 그 인간과 행인은 같은 건설 TF로 발령났고, 거기서 생 노가다를 같이 했다. 공장건설이 끝나고 가동이 시작되면서 그 인간은 '직장(반장과 대리 중간쯤 되는 직급)'으로 승진했고, 같은 생산과 안에서 행인과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물론 행인은 기냥 현장 '공돌이'였다.
사실 현장에서 같은 지위에 있을 때, 그사람과 행인은 참 죽이 맞는 그런 관계였다. 짠돌이로 소문이 파다한 사람이었는데, 술자리에서 자기가 술값을 낸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행인도 TF에서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공장 안에서 이야기도 많이 했고, 뭐 시원시원하니 괜찮은 선배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죽이 잘 맞았던 것은 서로 공고라는 션찮은 학벌로 인해 회사 안에서 많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고, 일은 힘들고 상사들은 같잖다보니 궁시렁궁시렁 할 때 그놈의 코드가 제법 맞았기 때문이다.
이사인 공장장과 그 밑에 부장, 실장, 과장, 대리 등등 상사들의 징글징글한 업무독촉에 대해서 같이 욕을 했고, 바로 위 직급인 직장들이 지들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고(이 공장에서 직장들은 다 고졸출신의 현장작업자들이 짬밥 차면 올라가는 직위였다. 대졸사원들은 입사와 동시에 3급 사원이 되는데, 직장은 4급이다) 현장 노가다들에게 함부로 하는 것에 대해 함께 분노했다. 입대하기 전에도 가끔 이런 이야기들을 나눈 사이고, 복직한 후 같이 일하게 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더 많이 한 그런 사이가 그 인간과 행인과의 관계였다.
문제는 이 인간이 직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나더니 갑자기 사람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함께 이야기했던 공장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거쳐왔던 직장들, 아니 공장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직장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강도의 인사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지가 잘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자에게 떠넘기기 일쑤고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을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면서도 상사들에게 어찌나 손바닥을 잘 비비는지 상사들이 작업자는 못믿고 이 인간을 믿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 인간 싫다고 회사 때려치우는 사람들이 속속 발생했다. 특히 인력도급업체에서 파견나와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이 인간은 악명이 높았는데, 우리 생산과에서 오래 버티는 젊은 친구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그 인간과 행인도 서로 감정이 쌓여갔다. 안그래도 성질 더러운 행인, 그 꼬라지 봐주기가 힘들었던 거다. 매사 티격태격하면서 싸움질을 하기 일쑤였다.
야간 근무를 하던 어느날이었다. 11월 말인데, 날이 무척 춥고 비까지 주룩 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12시간 맞교대 근무라서 저녁 7시에 출근한 야간조가 공정확인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는 시간이었다. 밤 10시쯤 되었는데, 갑자기 경보음이 울리면서 제품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원재료를 보내는 펌프에 이상이 발생한 것이었는데, 중앙통제실의 모니터에 이상현상이 표시되지 않았던 거다.
추산해보니 공정트러블의 최초 발생시점은 점심시간 이후였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해당 원료는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항상 높은 온도를 유지해주어야 하는데,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는데도 주간반이 미처 이를 계산하지 않고 라인 온도를 조절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공정이상은 이 원료가 펌프와 라인에서 굳는 바람에 발생한 것이었는데, 그 정도 굳으려면 적어도 대여섯 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터였다.
일단 수동으로 보조 펌프를 가동하고 해당 펌프를 분해했다. 보조 펌프를 돌리려는데 원료탱크에서 두 펌프로 가는 라인이 한 구멍에서 출발하는 것이었고, 이 라인 전체가 굳어 있어서 보조펌프 역시 가동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원료는 한 번 굳어버리면 녹일 수가 없고, 이것을 일일이 도구를 이용해 파내야 했다. 자칫하면 탱크안에 있는 유독성 원료를 뒤집어 쓸 우려도 있었으나, 공장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기에 억지로 작업을 계속했다. 일단 보조펌프를 가동하기는 했으나, 애초 보조적 역할만을 하는 펌프였기 때문에 정상가동을 위해서는 주 펌프를 빨리 고치는 수밖에 없었다.
펌프의 임펠러는 완전히 막혀 있었다. 게다가 굳어버린 원료는 고사하고 펌프 안에 이물질이 잔뜩 껴서 이를 제거하는데 애를 먹게 되었다. 라인을 청소하고 펌프를 다시 잇고 가동을 했는데, 가동이 되질 않는다. 장시간동안 과부하가 걸려서 코일이 맛이 간 거였다. 그만하기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코일 교체작업을 진행하였다. 오밤중에 찬비를 맞아가며 그 작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결국 5시간의 사투 끝에 작업이 완료되었고, 야식도 못 먹고 작업을 진행했던 우리는 온 몸을 덜덜 떨어가며 중앙통제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중앙통제실의 문을 열었다. 그 인간은 자기 책상 앞에서 의자를 뒤로 한껏 젖히고 잠에 취해 있었다. 중앙통제실의 문이 닫히는데 문 소리가 좀 크게 났다. 그 소리에 이 인간이 잠에서 깼다.
"뭐야, 이거?" 하고는 아직 잠이 덜 깨 부은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다가 지 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더니 그 다음 말이 가관이었다.
"이런 씨X 새끼들, 지금이 몇 시야? 조또 일 이렇게 밖에 못해?"하면서 버럭 화를 내는 거였다. 작업을 했던 사람은 행인과 행인의 9년차 선배, 그리고 4년차 후배 이렇게 3명이었다. 같이 일했던 '무능력한' 선배는 자기보다 2년 늦게 입사한 잘난 직장한테 졸지에 씨X새끼라는 욕을 먹어야 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는 후배는 안그래도 추워서 떨리는 몸에 불같이 화를 내는 직장을 보면서 눈치만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 있자니 이 인간이, "이런 섹귀덜이 월급만 축내요. 이 씨X 새끼들, 통제실에 물묻혀 들어오면 어쩌자는 거야? 다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여기서 행인의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이런 젓같은 쉑기가 어쩌구 하면서 행인은 들고 있던 30미리 스패너를 그 인간의 철제 책상에 집어 던졌다. 쌕소리를 내고 날아간 스패너는 그 인간의 책상 앞면을 푹 찌그러뜨려놓았다.
"야 이 개쉑기야, 그렇게 일 잘하는 니가 나가서 비맞고 일해봐. 이 개쉑기가 직장이 무슨 벼슬이야?" 원래 행인의 입이 좀 걸다. 욕을 고래 고래 하면서 들고 있던 연장을 또 집어던졌다. 이번에는 연장이 날아가 그 인간 머리 위를 살짝 스치고 뒷 벽에 충돌했다.
"뭐야? 이 존마난 쉑기, 너 지금 머라고 했어? 이쉑기가 보자보자하니까, 이게 이젠 위 아래도 없어?"
"위 아래? 그래 위 아래 따지는 쉑기가 형님한테 씹X새끼라고 했니? 이 개싸가쥐야."
"뭐, 이게 계속 올라붙어?"
"그래 올라붙는다. 꼬움 나가서 한 판 뜨고~!"
사실 그 인간과 행인은 싸움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 인간은 거의 0.1ton에 육박하는 거구인데다가 고등학교시절 씨름부였단다... 맞짱 떠봐야 행인은 주어터질 게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정신으로는 절대 그런 소리 못한다. 그러나 눈깔이 홱 돌아가버렸는데 뭐 뵈는 게 있어야쥐.
암튼 이 인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길래, 안전모 벗어서 바닥에 패대기를 치며 중앙통제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니미, 사표 쓸께, 응? 사표 쓴다고. 어디 여기서 펴~~엉생 직장이나 해먹고 잘 살아봐라. 응?"
그리고는 기숙사로 돌아와버렸다. 방구석에 앉아 있자니 잠도 오지 않고, 해서 소주병 꺼내놓고 깡소주를 빨고 있는데 누가 방문을 노크했다. 대답없이 있으려니 문을 삐죽 여는데 그 인간이었다.
"야,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당신하고 이야기할 거 없어. 글구 사표는 낼 아침에 갖다 낼테니까 그렇게 알고."
"..."
"문 닫고 꺼져 10새야!"
그러구선 병나발을 불었다.
한참 지났는데 또 노크소리가 난다.
이 인간이 커피 두 잔을 뽑아들고 왔다.
그리고는 이야기 좀 하잔다.
이야기 할 거 없다고 하고서는 그냥 드러누웠다.
드러누운 행인을 쳐다보고 있던 이 인간이 결국 그냥 돌아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아침부터 대리가 쫓아오고 과장이 쫓아오더니 결국 부장까지 쫓아왔다.
화해를 하라는둥 어쩌구 저쩌구 하고 행인은 사표 쓴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그러다가 문득 행인은 갑자기 무서워졌다. 만일 내가 저 자리에 올라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이 들자, 자신이 없어졌다. 나도 똑같이 되지 않을까, 아니 나는 더 심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원래 성질 더럽지, 지 멋대로 하려고 하지, 왠만하면 고집불통이지... 아, 정말 저렇게 된다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유형이 내 미래의 모습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과연 누구에게 욕을 하고 누구를 비판할 수 있을까...
그 인간은 안좋은 측면에서는 그렇게 행인을 열받게 했지만, 좋은 측면에서는 행인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끔 만든 사람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그 인간과 행인은 계속 티격태격 했으며, 행인이 진짜 살의를 품은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결국 회사를 그만 둔 이유 중의 하나도 그 인간 때문이었다. 암튼 이 사건 이후에 약 1년을 더 회사를 다니고야 말았다...
이런 상사,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지만, 또 한 편에서 내 스스로가 절대 이런 상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다시 해본다.... 흠흠...
리얼액션다큐를 보는 듯 해서..흥미로우면서도..정말 나는 어떤 모습인가..생각하게 하네요. 정말 사람에게서 배우나 봅니다.
권력은 정말 풀기 어려운 명제임에 틀림없슴돠. 사적관계에서건 공적영역에서건...^^
글로 보는 것보다는 형이 얘기해 줄때가 더 재미있었죠. 그리고 글을 일으면서, 형이 말하는 표정, 말투가 생각나서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