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운동을 시작했던 이유
아직까지도 정당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서, 정당운동에 대한 고민은 떠나지 않는 화두다. 원론적인 측면에서 교과서적인 정당론이 존재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원칙적이고 이상적인 정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추구의 대상이 되기에 가치를 가질 뿐이지만.
사실, 이상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관점에 따라 이상은 제각각 얼굴을 달리한다. 단칸방에서 삼대 일고여덜명이 바글거릴 때 꼬맹이의 꿈은 내 방 하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방을 가진,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어떤 대상이 그 꼬맹이에겐 이상이 되었을 터. 세월이 흐른 후, 이젠 부부가 각방을 써도 방이 남지만, 그 방 여럿 있는 집이 제 집이 아니라는데에 한숨이 나올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의 꿈은 마이하우스이고, 그의 이상의 표본은 집가진 누구일지 모르겠다. 뭔 소리여, 시방...
암튼, 정당도 그러한데, 아직까지 이런 정당 없었기에 이런 정당 한 번 만들어보자고 했던 게 정당운동이었다. 거창하지만 소박했던 진보정당운동. 내게 있어 제도권 내의 정당운동이라는 것은 혁명노선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형식적으로는 제도정당운동을, 실질적으로는 혁명정당운동을 하면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간혹 들었지만, 정당은 그런 식으로 접근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운동권 물 좀 먹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듣기 싫어하는 말이 '개량'이다. '개량주의자'라는 말은 그 현학적인 용어의 겉면과는 달리 내용적으로는 '배신자'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제도권정당운동에 대한 고민의 혁명론자들의 입장에서는 개량의 시발이었고, 제도권정당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은 개량주의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난 이러한 도식적 구분을 좀 우습게 아는 입장인지라 쉽게 '개량주의작'가 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건 처음 제도권정당을 고민할 때는 아, 이런 씨앙, 내가 저따위 욕을 먹어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모든 이상은, 그 전부를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에 근접한 실체가 현존할 때 기능한다. 머리 속에만 있는 이상이라는 건, 그냥 망상이다. 이상을 망상이 아닌 현실로 만드는 방법은 몇 가지 가능한데, 가장 빠른 방법은 현존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버리고, 이상이 관철되는 사회로 직진하는 거다. 통상 이러한 방식을 혁명이라고 한다. 단, 그것이 성공했을 경우에 한해서. 실패할 때는? 반역도당이 되고 숙청된다. 시절이 좋을 때라면 징역 몇 년으로 끝날지 모르겠다만, 시절이 더러울 때면 본인의 능지처참은 물론이고 삼대 멸족도 감수할 판이다.
어쩌면 세월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내가 심은 사과나무가 언젠가는 열매를 맺겠거니 하면서. 사람들의 인지는 발전하는 법. 차근 차근 과학적 합리주의와 객관적 이성주의가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체제로 자리잡으면 언젠가는 현재의 문제가 하나 둘 해소될 날이 오겠거니 하는 거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다고 되는 건 아니고, 일정하게 이상향의 그림을 만들고 실천노선을 짜고 조직하고 선전하고 실행해야겠지. 하지만 당장 다 뛰어나가자고 하는 건 아니고, 차근차근 변해보자고 설득하고 동조자를 만들어나가야겠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언제 그놈의 사과를 따먹는 순간을 현전시키느냐이다. 서구 백인들이 아프리카 주민들을 끌고가 착취하던 노예제를 폐지하는데 물경 4백년이 걸렸다. 시민혁명이 일어난 후 양성평등이 보편적 사회가치로 인식된 것은 적어도 150년이 흘러서 가능했다. 양성평등에서 '양'자 한 자 빼자는 이야기가 본격화된 건 불과 몇 십년 되지도 않았다. 한국사회에서만 보더라도, 장애인들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선언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게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는데, 장애차별철폐는 다음 세기에나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이 방식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대국적 차원에서 내 대에서 안 되면 다음 대에, 다음 대에서도 안 되면 그 다음 대에는 바뀔 것이라는 믿음으로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가당찮은 게, 내 다음 대가 나와 같은 이상을 바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는가? 혹시 그들은 내가 원하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을까? 내 이상을 그들에게 물려주는 게 그들의 자유로운 이상의 추구를 방해하는 건 아닐지?
아... 이거 뭐 이야기가 계속 가지치기를 하니... 기왕에 두드린 자판 물르기도 아깝고 하니, 여기서 다시 정당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제도권정당을 고민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꿈꾸는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어떤 수단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난 예전에, 지금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한 이후 문화운동에 대한 노력은 많이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민했던 것이, 운동이라는 것은 혼자 주절거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조건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가장 바람직한 구조는 무엇인가였다. 그리고 그 구조가 바로 정당이었다.
어떤 지역이든, 시민단체니 뭐니 하는 조직들이 산재해 있고, 지역의 유지들이 있고, 활동가들이 있고, 이 조직이며 유지며 활동가들이 관공서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다못해 예배당도 있고 성당도 있고 법당도 있고 이런 류의 종교단체도 많고, 각종 이익단체도 많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시민단체나 종교단체나 친목단체 등 여러 구조가 많은데도 굳이 정당을 택한 것은 다름 아니라 정치적 책임이 분명하다는 면 때문이었다.
이상을 현실화한다는 것은 이상이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보편성을 드러내는 징표는 무엇인가? 바로 제도다. 법이 그것이다. 내가 볼 때 법은 언제나 뒷북이다. 법은 뭔가가 사회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필요성이 발생했을 때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어떤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날 때 입법이 이루어진다. 어떤 사회적 관계가 상충되어 법적 정리가 필요할 때 사법이 기능한다. 법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추상적 사실을 선험적으로 추론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 안드로메다 성운의 어느 행성 거주민과 지구인 간의 민사에 관한 법률을 지금 만들 수는 없는 거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행법률이라는 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를 보편적인 삶의 기준으로 용인하고 있는 어떤 원리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법으로 제정되고 시행되는 것은 일단 그 사회의 보편적 규범인 것이고, 그 규범 안에 녹아 있는 어떤 이념이 그 사회에서 현재 보편적으로 수인되는 이념이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도식이 도출된 결과, 한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제도화해낼 수 있는 자들이야말로 그 사회를 자신들의 이상과 맞추어나가고 있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보편성을 상징하는 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정치적 역량과 이 역량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제도로 승화해낼 수 있는 조직인데, 내가 볼 때 그 조직은 바로 정당이었다. 정당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변단체는 물론이고 인권단체 및 시민단체나 종교단체나 친목단체는 압력단체로서 기능하면서 정치적 권리는 무한히 행사하지만 막상 정치적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엄청난 장점인 동시에 바로 이들 단체의 한계가 되는데,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당사자가 되지 못한다는 게 이들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정치적으로 막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정치적인 어떤 사안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당에게 빌붙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정당은 이처럼 힘이 있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정당은 정당운동을 필요로 하는데, 그 이유는 한국의 정당이 희안하게 정당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과서적인 정당의 정의(定意)에 부합하는 정당의 구조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당운동이 되어버리는 이유다. 물론 지금까지 등장한 진보정당들이 그러한 정의에 부합하는 정당을 구성하였느냐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말이다. 보수정당들이, 그것도 실질적으로 양당구조가 고착된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진보정당을 만들고 운영하겠다는 것은 운동의 관점이 아니면 그 의지를 세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아마 오랜 동안 이러한 상황이 급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으로 세상을 다 때려 엎는 것보다는 느릴지몰라도 그냥 주변 정리나 하면서 세상 바뀌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좀 더 빠른 방안이 정당운동을 통해 내가 바라는 이상을 제도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결정이 있은 후 지금까지 20년이 지났고, 그 와중에 보수정당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꼴을 보는 건 물론이려니와 그보다 더한 꼴도 보면서 이골이 날대로 나기도 했지만, 정당운동을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그 고민의 진행과정과 결론은 거의 차이가 없다. 어떻든지 간에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정당운동이 필요하다는 거.
비록 어떤 이들은 한국사회가 정당에게 과도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정치적인 비중을 높이 쳐주고 있기에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내 입장에서 한국사회는 군웅들이 지역을 할거하고 깃발을 날리면서 그 도당을 '정당'이라고 참칭하고 있는 수준에서 보수정당이 있고, 그 반대편에 지지리궁상을 면치 못하면서 뭔가 정치적 행보를 걷고는 있는데 여전히 지들이 개량은 되고 싶지 않은 일련의 무리들이 뭉쳐서 "우리도 '정당'이다"고 자위하고 있는 상태가 정당정치의 수준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에 대해선 동의하지 못하겠다.
정당이 정치과정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데, 이건 정당의 권력이 엄청나다고 전제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기실 한국의 정당을 들여다보면 그 정당 안에 있는 개별 의원들이 각각 개별적인 정당으로 기능하고 있기에 전제에 대한 다른 판단이 필요할 지경이다. 어째 글이 만연체가 되어가고 있ㅇ...
아직은 정당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고자 백수가 되었다...는 무슨 얼어죽을... 내게 일을 다오...ㅜㅜ 정당, 정치, 정당정치, 정당운동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그 내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다듬는 시간을 가지려고 계획 중. 지난날의 소회 같은 것도 간간히 정리해보고.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