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운동과 제도화 투쟁의 상관에 대한 소회
그람시가 말했다고 잘 알려진 말 중에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런데 정당운동을 시작한 이래, 그것도 진보정당운동이라는 뭔가 거창한 운동을 시작한 이래, 이 운동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저 말을 희안하게 해석하는 모습을 간혹 보게 되었다.
내가 희안하다고 생각한 것은, 쉽게 말하자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저 말을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합리화하는데에 동원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존 제도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고 제도화를 위한 어떤 과정 자체를 별볼일 없는 것처럼 희화하는데에 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난 솔직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정당운동을 왜 하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떤 생각이 보편성을 획득한 징표 중의 하나로 제도를 꼽는다. 제도 또는 법은 어떤 생각이나 행태가 그 사회에서 제도적 및 법적으로 규정되고 관리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표식이다.
그 제도나 법이 정의의 관점이나 민주주의, 인도주의 등의 기준에 미흡할 수도 있고, 자칫 반인권적 반민주적 권력집단에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부당한 구조가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및 정치적 맥락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어떤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든 부정적인 측면이든, 사회구성원이 속박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긍정적이라면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고, 부정적인 것이라면 투쟁하고 타도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현존하는 제도는 그 제도를 부정하거나 희화한다고 해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악법은 어겨서 깨트리리라"는 말은 당위로서 인정되어야 하겠지만, 그 자체가 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 두 개념은 엄연히 다르고, 따라서 사후의 대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스템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악법을 어겨서" 깨트린 그 자리엔 정법을 세워야 마땅하다. "악법을 어겨서" 깨트린 그 자리엔 이제 법이 필요 없는 세상만이 남아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미안하지만 꿈 깨라고 하고 싶다. 그런 세상은 인간이 지성을 소거해버리지 않는 한 도래하지 않는다. 난 그래서 아나키스트를 자칭하는 사람들에겐 믿음이 잘 가지 않는다.
나는 제도만능주의를 믿지는 않는다. 법이 이렇게 만들어지면 어떤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식의 등식은 제도를 구성하고 설명하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애초에 인간세계에서는 장담할 수 없는 등식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이 세계는 약물의 도움 없이 이퀄리브리엄이 실현된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법은 최소한'이라는 절구는 그래서 아마 인간시대가 마감될 때까지 명언으로 남게 될 거다. 제도만능주의, 법률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일종의 물신주의로서 법물신주의는 결과적으로 법의 주체여야 할 인간을 법의 도구로 전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그 주체성이라는 것이 부각되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될 때만 "법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주제를 둘러싼 계급 간 투쟁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현행의 법이 나의 것임을 확인될 때에야 비로소 나의 생각이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했음이 드러난다. 이것은 법치주의를 준법주의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나중에 별도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할 기회를 가지도록 하자.
아무튼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정당운동의 여러 핵심 중에서 제도화운동은 관심이 많은 분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름 또 열심히 그 분야에 천착해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과정을 허무하게 만드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했는데, 제도의 무망함을 마치 고금의 진리인냥 이야기하는 가티 활도하는 동지들에게서도 많은 타격을 받았다.
나중에는 좀 신경질이 나기도 했는데, 아니 그렇게 법(제도)이 쓰잘데기 없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법률안을 만들고 법정에서 '존경하는 판사님'을 찾아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일수록 의지로 낙관하는 빈도와 강도가 높은데, 이런 의지는 곧잘 정신승리라는 형태로 드러나곤 한다. 이들이 열심히 투쟁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분들일 수록 어떤 사안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성의 비관이라는 건 의지의 낙관을 위한 알리바이가 아니라, 의지의 낙관이 현실의 실체로 드러나게 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고, 그 낙관의 미래를 가능케하는 실천노선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관이라는 건 비판과 부정으로 종료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비관은 낙관의 다른 이름일 뿐이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제도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게 제도에 대한 고민 없이 "투쟁으로 돌파하자"는 말만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정당운동은 그러므로 더욱 치밀하게 제도화를 고민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거기엔 플랜A는 물론 플랜B, C. D...가 있어야겠다. 각 플랜들의 핵심은 쟁투의 대상이 된 타 정치세력에게 내어줄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내가 설득해야 할 사람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범위를어디까지 넓힐 수 있을 것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런 거 없이, 그저 제도는 필요없고 투쟁만이 답이라고 하는 행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을 운운하는 일은 좀 없었으면 한다.
덧붙이자면, 현존 제도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제도라는 어떤 틀 자체에 대해 부정한다면 그냥 예배당을 다니는 게 낮다. 이런 사람들은 혁명을 해봐야 지들이 떠든 대로, 즉 법 없이 살지도 못할 사람들이다. 혁명은 지금과는 다른 제도를 만드는 과정이지 지구상에서 제도라는 걸 없애는 과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