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직업으로서의 정치 100주년이라는데...
정년퇴임을 앞둔 행정학을 가르치시던 노교수께선 한 학기 3학점 수업 내내 베버에 대한 이야기만 하셨더랬다. 베버의 정치사상을 이야기하거나 학문적 성과를 소개하거나 행정학에 미친 베버의 영향 등을 강론하시...기는 개뿔이고, 이냥반은 정말 질리지도 않게 한 학기 내내 수업이 시작하면 베버가 어느 동네서 살 때 누구랑 썸씽이 있었고, 어디어디를 놀러다녔고, 누구랑 친했거나 척을 졌고 등등 온갖 비하인드 스토리만 쏟아냈던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것만 줏어 들으셨는지, 베버의 사생활만 전문적으로 파헤친 스토커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행정학 교과서는 독할을 위한 교본일 뿐이었으며, 세 시간 강의 중 약 두 시간을 베버의 사적 스토리만 떠들다가 한 20~30분 정도 씨잘데기 없는 농담으로 버무려진 이 행정학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님은 간혹 자신이 이 학교에서 얼마나 찬밥 신세였는지에 대해 넉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래도 모처럼 나이 먹고 들어간 대학이랍시고 첫 학기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책을 붙들었다. 수업시간에 들은 베버의 이야기는 저녁에 먹은 학식과 함께 자연스럽게 변기로 배출되었으므로 하나도 기억에 남은 게 없다.
그리고 행정학 학점은, 같은 수업을 들은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훌륭한 답안을 작성했다고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쓰레기가 나왔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교수께서는 일단 여학생(으로 보이는이름)을 앞에 두고 나머지 이름은 뒤로 배치한 다음, 가나다 순으로 학점을 매긴다고 하더라. 이 소문이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결정적으로 동기생 중 여학생 이름으로 오인하기 쉬운 이름을 가졌던 한 녀석이 가나다순으로도 거의 맨 앞에서 두세번째 위치하는 이름이었는데 이놈은 에이뿔따구를 맞았더랬다... 생긴건 산적 쌈싸먹게 생긴 놈이었는데...
막스 베버가 직업(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강의한 지 오늘로 100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한다. 1919년은 독일에서 바이마르 헌법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해이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고, 그 패망의 여파로 결국 제정이 붕괴되었다. 1918년 11월 혁명은 독일의 기존 질서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제가 도망간 그 자리를 채운 대안은 공화국이었고, 1918년 말과 1919년 초는 이 공화국의 운명을 가를 시금석을 놓는 시기였다.
1919년 1월 19일, 독일은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2월 6일 바이마르에서 첫 국민회의가 진행되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제헌작업을 시작할 것이었다. 막스 베버가 직업(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강연한 시기는 바로 이 제헌의회가 구성되는 기간의 한 가운데였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이건 뭐 그냥 도덕군자가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불과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특히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전체적으로 가치중립적 위치에 자신을 놓으려는 그 태도였다.
그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 자본주의의 본색이 제국주의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시기이며,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이며, 불바다가 되었던 유럽 전역에서 지금과는 다른 체제를 요구하는 민중의 소요가 들썩이던 때였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건설된 소비에트가 1918년 혁명헌법을 제정하였고 그 여파로 인하여 인근 자본주의 국가들이 붉은 혁명에 노이로제가 걸려 있는 때였다.
이런 시기에 태평하게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균형을 이야기하다니... 그러다보니 막스 베버에 대해서는 어쩌면 일정한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찌하다보니 정당운동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대한 논의에 개입도 하고 직업적 정치인들과 부딪치기도 하고 정당과 정치, 정치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전공도 하필 헌법인지라 정치적 측면에서 공부를 깊이 있게 진척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지내고 나서 들여다본 이 직업(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처음 봤을 때의 그 삐딱했던 비판적 관점을 점점 넘어서서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생각할 여지를 넓혀주는 그런 글이 되어주고 있다.
이념적으로야 막스 베버는 나와는 상당히 먼 거리에 서 있다. 하지만 사안을 들여다보는 그의 태도는 배워서 취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안을 판단하려는 자세이다. 나는 제법 감정이 앞서는 성격인지라 그것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진짜 힘든 것이, 이성으로는 그 문제를 알고 있지만 막상 일이 터지면 감정이 앞서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공부하는데 있어서도, 나는 최대한 이 약점을 억누르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를 분석하거나 비판하거나 할 때는 감정이 개입하여 입장의 선후를 먼저 만들어 놓는 일이 자꾸만 발생한다는 거.
내 업보인지라 이 블로그에서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특히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라치면 나의 약점은 극대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조금은 학술적인 문법으로 정리하여 글을 만들어낼 때도 바로 이 약점때문에 아주 힘든 경우가 많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감정적으로는 일의 순서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실질적인 데이터는 그와 반대로 나올 때, 이거 막 화가 나고 아니 뭐 다른 자료 없나 찾게 되고, 그러다가 계속 막히면 머리 식힌다고 프리셀이나 하다가 에라 씨앙 다 때려치~! 이렇게 되는 거...
직업(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아마 앞으로도 지금까지 읽었던 횟수보다 더 많이 읽게 될 책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다고. 오늘이 100주년 기념이라니까 한 번 돌이켜봤다. 그나저나 그 행정법 교수께서는 아직 살아계신지 모르겠다. 살아계셨으면 아마 오늘같은 날 또 사람들 붙들어 앉혀놓고 베버가 바람피운 이야기 해준다고 설레발을 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