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정신은 어디까지인가?

현행 베네수엘라 헌법 전문에는 "우리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역사적 사례와 ... 조국의 선구자들과 건설자들의 영웅적 희생을 기린다."라는 문장이 서두에 들어가 있다. 19세기 초엽에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남미 일대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킨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정신을 베네수엘라 헌정질서의 근간으로 하겠다는 선언이다. 시몬 볼리바르는 군인이었고, 그의 독립운동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베네수엘라 헌법은 헌정질서를 건설하고 수호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무장투쟁을 옹호하는가?

한편 베네수엘라 헌법의 마지막 조문인 제350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베네수엘라의 국민은 공화국의 전통과 독립, 평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그들의 투쟁에 충실하여, 민주주의적 가치, 원칙, 보장을 침해하거나 인권을 경시하는 그 어떠한 체제, 입법, 당국도 무시할 수 있다."

"무시"의 방법은 어디까지일까? 내전조차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차베스가 발리바르 헌법으로의 개정을 단행할 당시, 이 헌법은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이후 좌파정권의 체제를 수호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처럼 여겨졌다. 물론 헌법이라는 독특한 질서체계가 한 번 구성된 후에는 그것이 좌우 어느 한 편의 무기만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했거나 혹은 생각하지 않았던 반응이었지만.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헌법의 시종을 담당하는 저 두 규정의 의미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 것인가? 인민의 삶을 도탄으로 몰아넣는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위력이 준동할 때, 공화국의 시민은 무장투쟁으로 대응할 수 있는가? 그 무장투쟁은 저항권의 행사인가, 아니면 반란의 봉기인가? 헌법은 저항권의 행사방식에 무장투쟁까지를 포함할 수 있는가? 보장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탄압하는 반민주 반인권 집단에 대한 투쟁을 헌법은 어떻게 보장하나?

이 딜레마는 조금만 깊이 고민하면 해결이 요원하다. 헌법이 민간인 시민의 무장투쟁을 허용한다면, 헌법은 스스로의 존립을 언제나 벼랑 끝에 올려놓게 된다. 과연 헌법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이 상황을 용인하겠는가? 그런데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시민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면서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에 대해 인민은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 독재자의 측근 중 누군가가 독재자의 가슴에 총알을 박을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독재자가 조금은 기력이 딸리는 친구에게 정권을 넘겨줄 때까지? 그 기간 동안, 헌법은 인민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으며, 인민의 저항권을 무엇으로 보장하는가?

학문적으로 어떤 기준을 명확하게 그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으나, 특히 이처럼 헌정질서 내부의 어떤 체계를 다룰 때는 그러한 일도양단적 기준을 제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사례마다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그 기준의 저간에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인권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이다.

최근 박지원의 망발과, 김진태 류의 망언이 터지면서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포함하여 추후 이러한 망동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쐐기를 박아놔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개헌을 하게 되면 헌법 전문에 518정신을 넣겠다는 것이 현직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거니와, 예전부터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 주장이 있어왔다.

헌법 전문에 반드시 518정신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면 형식논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현행 헌법이 31운동의 정신을 넣어놨고, 이 구절은 제헌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오늘날 광장에서 태극기 흔드는 사람들이 과연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저러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부분이 그렇다. 형식논리만으로 보자면 넣거나 말거나 큰 상관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헌법의 표현들을 단지 우리도 이런 헌법이 있다고 포장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면, 헌법 안에 들어가는 어떤 구절이든 어떤 규정이든 그것이 살아 숨쉬면서 사회 안에서 가치를 발휘하게 만들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공화국의 시민들이, 이 헌법이 나의 헌법이며 내가 만든 헌법이고 그래서 지켜야 할 헌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한 구절을 집어 넣을 때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철저하게 밝히고 합의하고 지킬 것을 약속하고 그래야 할 것이다.

518정신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데, 우리는 과연 전두환 일당과 같은 자들이 또다시 무력으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정신을 파괴하려 할 때, 광주의 시민군이 그랬듯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고 이 무뢰한 폭도들에 대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삽입한다는 건 그런 의미를 명징하게 박아 넣는 것이라 해석해도 되는가? 한국의 좌파는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는가? 한국의 우파는 이를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518 정신이 헌법에 들어갈 때, 당연히 이런 정신이 선언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장투쟁을 헌법이 용인한다고 해석할지라도, 그것은 헌정질서의 수호를 위한 저항권의 행사에 제한된다는 한계가 있다. 현행 헌법체제에 의거하여 탄생한 정부가 있음에도, 체제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예컨대 계급해방투쟁의 일환으로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은 결국 518정신을 헌법에 집어 넣는다고 한들 부정될 것이 뻔하다. 그것까지 용인하는 헌법은 기실 그 헌법 자체가 자기 체제를 부정할 수 있다는 건데 이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집어넣자고 주장할 것이라면 이 정신이 무장투쟁까지 포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면밀한 내용까지 검토됨이 없이 그저 헌법에 한 구절 말만 집어넣고 말 것이라면 아예 그런 논의는 하지 않는 게 낫다. 만들어놓고 나서 뭔 딴소리 나오면 그랬던가 저랬던가 하다가 헌법재판소에 넘겨놓고 탱자거리게 될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말이나 꺼내지 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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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09:53 2019/02/1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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