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과 반지성주의
몸이 힘들어지면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비례적으로 증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삶이 고단하고 생계가 핍진할 때,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이라는 건 그냥 뜬 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해진다. 사흘 열끼를 굶은 사람에게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는 설득은 달콤한 유혹이기보다는 매를 부르는 망언이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어떤 가르침은 정작 빵을 먹은 다음에야 귀에 들어온다.
왜 나는 가난한가? 왜 나는 고통받아야 하나? 이런 의문이 자괴감으로 이어지기 쉬운 건 이 의문을 품은 사람들의 자존감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의문 앞에는 어떤 조건이 붙게 되는데, 나는 열심히 일했건만, 왜 나는 가난한가? 나는 나만을 위해 살지 않았는데 왜 나는 고통받아야 하나? 기실 이 질문의 핵심은 자신이 수행했던 일정한 역할에 대한 보상이 자신의 기대만큼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고 있지 않기에 타인과의 비교는 숙명이며, 여기서 인간의 자존을 흔드는 요인은 내 자신에 대한 절대적 평가가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로 인한 상대적 평가이다.
이 틈을 누군가가 파고든다. 봐라, 저 놈 때문에 네가 요꼴이다. 어때, 이런 구조 때문에 네가 요모양이다. 이런 말은 당장 내가 왜 이런 형편에 처해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직관적 답변을 제공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 내가 힘들고 고난에 처한 것은 다 저것들 때문이고 이 시스템 때문이야. 아주 간명한 답이지만 매우 확실하게 가슴에 파고드는 답이다.
"우리 직장이 사라지는 건 여자들 때문이야"라는 어떤 남성들, "우리 일거리를 뺏아가는 건 외노자들이다"라는 어떤 노가다꾼들, "내 수입이 줄어드는 건 없이 사는 놈들때문에 세금으로 뜯기기 때문이야"라는 어떤 샐러리맨들, "내가 가게를 때려 치우게 된 건 최저임금 때문이야"라고 하는 어떤 영세 자영업자들. 이들은 나름의 답변을 얻은 셈이다. 그 답변이 일정한 정합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 타당한 답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불만과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직관적인 답변이라면 충분하다.
문제는 이 답변을 해주는 사람이 실은 문제의 원인인 때가 있다는 것. 자신에게 돌아와야할 일단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는 한편, 더나가 오히려 이를 기화로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자들이 점차 득세를 하고 있는 상황도 눈에 띈다. 자신의 형편이 곤란해지는 원인에 대하여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하다가 말도 되지 않지만 그럴 듯한 답을 해주는 자에게 관심을 돌리고 그에게 희망을 걸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구조 속에서, 어떤 나라에서는 날씨의 변화와 지구온난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어떤 나라에서는 인권이고 뭐고 뽕맞은 것들은 다 즉결처분이라고 부르짖는 자가 대통령이 된다. 어떤 나라에서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애를 더 낳으라고 4인 이상 자녀를 둔 어머니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겠노라 정책을 낸다. 어떤 나라에서는 노동3권의 의미조차 모르는 자가 교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손꼽히는 대학의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한다.
며칠 전에 인간의 인성은 어디까지 저렴해질 수 있는지 난감한 마음을 포스팅했었는데(인간의 저렴성),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이 바로 소위 '반지성주의'의 일단이 아닌가싶다. 노동조합의 파업을 응급실 폐쇄에 비유한 이 자가 사회학자라는 사실도 새삼스럽지만, 이러한 쓰레기 글에 달린 지지의 입장들을 보면 한국사회에 작동하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 흐름은 자유한국당 당대표경선과정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황교안, 오세훈, 김진태 3인 각축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 이벤트에서, 그들의 말과 그들을 둘러싼 자들의 반응은 한국사회의 반지성주의가 간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유수의 대학 중앙도서관 관장의 지적 수준이 반지성주의의 쯔나미를 걱정하게 만들만큼 거창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서관장의 칼럼에서 시작해 일련의 사건들을 조립하면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이미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촛불의 반대편에 서있었던 태극기부대, 제주난민문제로 촉발되었던 각종 난민반대논리들, 미투운동에 대하여 격렬한 반대를 실천하는 안티페미니스트들, 지만원 류의 반동적 역사관의 공공연한 표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자유한국당 당대표 경선 이벤트 과정에서 속출하는 수구의 준동...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합리적이고 논리타당한 인과관계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미리 결론지은 자신들의 견해를 확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논리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이렇게 부끄러운줄 모르고 세를 확장하는 오늘날의 현상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저들 반지성주의를 뒷받침하는 남한사회 철의 30%는 여전히 그 옹벽을 굳건히 세운 채 현존한다. 그리고 그들의 저변에는 어떤 대학 중앙도서관장같은 자들이 지성의 가면으로 반지성을 유포한다. 이러한 자들이 도서관장을 하고 있는 그 도서관은 도서관의 기능을 상실한 채 각종 수험준비를 위한 장소로 이용될 뿐이다. 지성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은 도서관은 반지성주의의 산실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