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과 함께
그러고보면, 나는 그동안 주머니가 좀 많이 빈 것이 문제였지 그 외 다른 점에 있어서는 크게 힘들고 고통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이건 뭔가 옛날은 다 좋았었던 것이여 하는 수준인지 모르겠다만.
물론 그동안 만난 사람들 중에는 개쓰레기같은 것들도 있었고 성인군자같은 분들도 있었다. 나는 만남이라는 건 언제나 소중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보니, 특히 같이 일하거나 같은 취지로 모였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쪽이 신뢰를 버리지 않는 한 내쪽에서 먼저 마음을 끊지는 않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이유도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도구처럼 사람을 이용하려는 경우도 겪었고, 어떤 이는 구밀복검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를 경험으로 깨닫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말도 되지 않는 마타도어 퍼뜨리면서 다니다가 나중에 맞부딪쳐 뻘쭘해 어쩔줄 모르던 인간도 있고... 이런 류들은 아직도 마음의 상흔으로 남아 다시는 얼굴도 보기 싫고 생각도 하기 싫은 경우.
반면 어떤 분은 내가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그저 모든 걸 다 주는 그런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도대체 따라잡을 수 없는 인식의 경지를 펼침으로써 내 눈과 귀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으셨던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쓰러지려 할 때마다 나타나 붙잡아 일으켜주는 기적을 몰고 다니시는 분도 있었고... 그런데 이런 분들의 특징은 게으른 나의 수준에서 잠깐 생각을 못하면 어느샌가 그 생사마저 알기 어렵게 된 상황이 많더라는 거...
사실 쓰레기같은 자들이야 더 만나고 싶지 않지만, 성인군자같은 분들은 뵙게 되면 황송하고 엄청부담스럽다. 그러고보면 나는 사람을 만나고 섞일 때 소소하게 그들과 잘 엮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하여 확실히 무지한 게 사실이다. 뭔가 나눌 수 있는 게 많을텐데 막상 닥치면 뭘 줄 수 있을지, 어떤 것을 나눌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잘 맺지 못하면서, 일이나 이념을 빌미로 거창하게 사람들을 만나다가 어떤 때는 쓰레기같은 자들 때문에 홍역을 치루고, 어떤 때는 훌륭하신 분들 덕에 처신의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된 듯. 아무튼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그나마 이런 극단의 경험은 그리 많지 않게 겪으면서 평균 이상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한다.
같은 동네 살면서도 서로 전화 안부도 제대로 묻지 않다가 신년 새해 맞아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어떤 분이 있어 짝꿍과 함께 집을 나섰는데, 짝꿍이 쌀 한 봉투를 꺼내온다. 한 1kg 남짓 될라나 하는 양이었는데, 시골에서 부쳐준 햅쌀을 개봉한 김에 만나는 분에게 밥 한 끼 해먹어보라고 갖다 준단다.
그러고보면 이게 참 별 거 아닌 듯한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까 쑥스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새해에 받아보는 햅쌀이라는 게 얼핏 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의미를 붙여보니 또 그럴싸하기도 하고, 우리 형편에 쌀이 남아도는 건 아니지만 그까이꺼 쌀 한 봉지가 엄청 값나가는 것도 아니고, 받는 입장에서라도 내가 만일 이런 선물을 받는다면 부담도 없고 재미도 있을 듯하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과 많이 이야기했고, 기분이 좋았다. 나도 저 쌀 한 봉지의 센스를 좀 가지고 싶다. 그런데 잘 안 된다. 10년을 넘게 이런 모습을 보았지만 볼때마다 감동할 뿐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한다. 이게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언제나 머리로만 생각하던 나쁜 버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