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10년... 뭐 어찌 되겠지...

어제 연구회 운영위에 참여했다. 주요 안건은 봄 학술대회. 일정과 진행 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주제분류와 참가자 선정 등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꼭지가 로스쿨 관련 내용이었다. 아이고, 로스쿨이라...

뻥구라닷컴이 2000년에서 2008년 사이 다뤘던 주제 중에 상당한 양이 로스쿨에 관한 거였다. 블로그 분류에 새로운 항목을 설정해서 로스쿨에 대한 글들을 모아봤다. 꽤 된다.

얼핏 훑어 보는데 뭐 옛 생각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다.

어제 회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난 로스쿨을 추진했던 몇몇 교수들의 진의와 선의를 지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한국 법학교육의 참상을 현장에서 경험했고, 하고 있었고, 사법제도가 사법고시에서부터 잘못 출발되어 기형적으로 왜곡되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의지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선의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나는 어떤 일이든지 바로 그 '선의'가 악마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로스쿨이었다. 선의가 전제된 이상론은 언제든 오염되어 금단의 열매로 변하기 십상이다.

뭐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고, 하긴 그 이전부터 로스쿨에 대해서는 반대를 해오다 보니, 관련해서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다. 특히 지도교수님과의 사이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어제 회의를 하다 갑자기 그 생각들이 떠올라서 웃기도 했다.

#1

1999년 1학기 환경법 시간. 나중에 지도교수가 되신 교수님께서 강의하던 과목인데, 그때만 해도 난 공부에 대한 열의로 타오르던 때라(!) 언제나 교탁 바로 앞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예로부터 선생이 튀긴 침을 많이 맞으면 훌륭한 성적을 낳는다고 하지 않던가!

하루는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들어오시더니, 환경법 수업은 하지 않고 난데없이 현행 법학교육과 사법시험의 문제점, 로스쿨이라는 제도의 장점 등에 대해 엄청 흥분하셔서 칠판에 판서까지 하시면서 열변을 토하셨다. 물론 많은 침도 튀기시고.

그러시더니, 손에 든 분필을 칠판에 탁 찍으시면서, "이렇게 좋은 제도(로스쿨)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수괴가 여기 앉아 있네요."라고 하면서 날 가르키셨다.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난데없는 그 공격에 난 어안이 벙벙해져 정신이 나가고... 수괴라니...ㅜㅜ

이 건은 전사가 있는데, 95-6년 당시 YS가 로스쿨 추진하려고 할 때, 서울지역 법과대학들로 로스쿨 반대그룹이 꾸려졌고, 거기에 몇 차례 입장을 낸 적이 있었다. YS는 결국 로스쿨을 철회했다. 그런데 이후 등장했던 DJ 정권이 다시 로스쿨을 추진했고, 당연히 또 여기에 대해 반대운동을 조직해서 진행했다. 그러다가, 아마 저 '수괴' 사건이 있었던 즈음에 DJ 정부도 로스쿨을 포기했다. 이때 지도교수님은 사법개혁 관련하여 많은 일을 하셨고 특히 로스쿨 도입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신 듯 하다. 그랬는데 두 정권에서 연달아 로스쿨이 기각되었으니 마음이 많이 상하셨기도 했을 터. 그래도 그렇지, '수괴'라니... ㅎㅎ

#2

1999년 말,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고, 평생을 모시게 될 지도교수를 물색하다가 낙찰 본 분이 바로 '수괴'로 날 찍으셨던 지도교수님이었다. 당시 교수님 방에 조교가 없었고, 마땅히 공부할 거처가 없었던 입장에서는 그 방에 들어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합격이 확인되자마자 방에 들어가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세 번 말씀 드려 세 번 다 거부당했다.

그랬는데, 마침 그 해 겨울방학에 교수님께서 외국으로 나가셨고, 때는 이 때다 싶어서 주인도 없는 방에 책상 하나 들고 들어가 자리차지를 해버렸다. 몇 달 지나 교수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연구실은 이미 나에게 최적화된 상태였기에 교수님께서도 어이가 없으셨는지 나가란 말씀이 없으셔서 그냥 눌러 앉았다. 그로부터 한 2년은 좋았는데...

2002년 대선을 전후해 교수님의 연구실에서는 금기어가 생겼다. 바로 로스쿨... ㅋㅋㅋ 교수님 연구실에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는데, 과거에 '수괴' 사건은 다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고 교수님과 어떤 주제든 어떤 내용이든 서로 이야기하고 논의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말 그대로 교수님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던 건데, 그 때 무릎맞춤으로 앉아 배운 내용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랬는데, 2002년 대선 어름부터 상황 묘하게 돌아가면서, 교수님과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는데, 로스쿨 때문이었다. 다 지나간 일인줄 알았는데 노무현 정부가 다시 로스쿨을 꺼내들었고, 이번엔 그 진행의 강도가 YS나 DJ때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강력했다. 당연히 지도교수께서는 그 물결의 한 복판에 계셨고. 그러다보니 암묵적으로 로스쿨이라는 단어 자체를 서로 간에 일체 꺼내놓지를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게 연구실을 나와서도 2005년까지 이어졌다.

#3

2005년에는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연구원으로 재직할 때인데, 로스쿨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첨예한 사회적 쟁점이 되었기에 거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특히 당에서 로스쿨 등 사법개혁관련 정책을 만드는 입장이었던지라 당연히 이 문제로 바빴다. 당은 로스쿨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고 이에 따라 각종 간담회, 토론회, 집회 등을 기획하고 진행해야 했다. 

한편 지도교수께서는 참여연대에서 로스쿨 추진의 핵심 역할을 하시면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젠 그동안 둘 사이에 금기어였던 로스쿨이라는 말을 서로 얼굴 맞대고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이런 저런 토론회에서 몇 차례 반대 입장에서 논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당에서 토론회를 주최하게 되었는데, 로스쿨 찬성 측 발제자 중 한 명으로 지도교수님을 초청했고, 반대측 발제자 중 한 명으로 내가 발제를 하게 되었다. 물론 당에서 진행하는 토론회이니 섭외며 진행이며 북치고 장구치느라 진이 빠지긴 했는데...

암튼 당일이 되었는데, 지도교수님은 오시지 않으시고, 현재 경북대학 로스쿨에 재직 중인 모 교수께서 대신 오셨다. 완전히 당황했지만 토론회는 진행을 해야 하니 일단 수습을 했고 토론회는 무사히 끝났다. 토론회 끝난 후 식사를 하면서 대타로 오신 교수님께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 교수님 왈, 지도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와 스승이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 하고 있는 게 영 께름칙해서 안 되겠다" 하시며 대신 해주십사 부탁을 했다는 거.

스승에게 못할 짓을 한 듯 하여 어찌나 겸연쩍던지, 암튼 그랬다. ㅎ

#4

아마 2012년 쯤이거나 2014년 쯤인 듯한데, 정확하진 않지만 총선 즈음인지 지선 즈음인지 큰 선거철에 지도교수님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정책때문에 여러 모로 조언을 얻는 일이 많은 시기인지라 역시나 빼먹지 않고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청해 듣고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던 건지, 아니면 뭔가 정책을 짜려고 그랬던 건지 모르겠으나, 외람되게도 지도교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로스쿨 관련해서 애프터 서비스 한 번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초 생각하신 대로 안 되는 거라면 뭔가 지금 시점에서는 평가와 정리가 있어야 할 듯 한데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한숨을 쉬시면서, 한숨을 쉬셨단 말이다, 한숨을... 암튼 쉬시면서, 그래야 하는데 일단은 사법연수원이 완전히 정리되고 난 후에 하자고 하셨다. 이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애초 로스쿨 추진할 때에도 지도교수님은 줄곧 사법연수원이라는 괴물을 폭사시키기 위한 방안이 없는 상황에서 로스쿨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셨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때 곤혹스러워하시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 지금도 그러시리라고 생각한다. 그 올곧고 여린 분이 로스쿨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고, 여전히 책임감에 시달리고 있는 걸 옆에서 본다.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에피소드들 뿐만 아니라 토론회 하다가 벌어진 일이며, 참여연대에서 기획해 진행했던 지지자들이 반대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건 등등과 관련하여 있었던 일이며, 재밌는 일이 많았다. 그건 그거고,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로스쿨이 점점 파행으로 점철되고 있는 걸 보면 답답함을 넘어 슬프다. 

어제 회의 중 어떤 운영위원이 로스쿨이 애초 설계와는 달리 변질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변질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에 그 당시 올렸던 글들을 보면 그 때 우려했던 일들이 지금 그대로 일어나고 있으니까. 뭔가 달리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이제 그 일은 내 일이 아니고, 다른 분이 정리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니 그 연구결과를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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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9 10:07 2019/03/2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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