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위기와 한국의 준비

기획특집 기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필로그의 제목은 매우 거창했다.

관련기사: 경향신문 - [세계지성과의 대화⑦] 자본주의 위기를 '기회'로 파악한 석학들, "한국은 전환할 준비 돼 있나"고 묻고 또 물었다.

지난 인터뷰 연재를 보면서 궁금했던 건 이 기획의 의도는 무엇이었나였다. 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분석과 비판, 그리고 대안과 운동을 소개하거나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는 그 인터뷰들은 신선한 자극을 주기보다는 낡은 레퍼토리의 반복에 불과했다. 세계의 지성들과 왜 이 진부한 논의를 기획까지 해가며 진행했을까? 그 의문의 답이 이번 기사의 제목이었나보다.

문제는 저 위기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데에서 출발한다. 맑스가 갈파했듯, 이미 자본주의는 태생 자체가 위기를 안고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닫힌 계인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을 가혹하게 착취하지 않는 한 유지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자원과 인간을 막론하고 이윤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한한 소비가 이루어져야 하며, 여기서 발생한 이윤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에게 집중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게 자본주의다.

이 구조의 한계로 인해 자본주의는 출발에서부터 위기였고, 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각종의 변주, 예를 들어 금융상품의 개발과 산업구조의 재편과 같은 모색을 지속했고, 일단의 성공은 여전히 위기를 발판으로 구성되었기에 위기가 고조되면 또다른 형태로 자본주의체제를 다듬어왔다. 이 연쇄는 무한반복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자본주의는 죽자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또다른 위기 위에서 만들어진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태생의 한계이자 영속적 제약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상태, 즉 소위 '신자유주의체제'는 이러한 위기 탈출을 위한 방편이자 위기가 계속되는 실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저 세계적 지성들이 '기회'로 파악한 자본주의의 위기는 어떤 위기인가? 그 위기는 전에 없던 위기인가, 전에도 있었지만 양상이 달라진 위기인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라 애초부터 있었던 위기가 더욱 심각해진 것인가?

문제 자체가 뭔가 새로운 답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었던지라, 저들 지성들이 내놓은 답이라는 게 과연 그들의 질문처럼 '전환'을 예비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뭘 전환하겠다는 것인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앞선 인터뷰들을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은, 저들이 마치 현재의 어떤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은 각종 안들이 과연 자본주의와는 다른 체제로의 전환을 이야기한 것인지, 혹은 백번 양보해서 다른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도기적 이행수단을 제시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 지성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의도와 다를지는 몰라도 내게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을 준비하는 대안이기보다는 보다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들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보자는 소극적 제안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경제의 거시적 대안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들의 제안은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부분에서 당장의 곤궁함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분배를 좀 더 균등하게 하고, 협동조합 같은 대안적 생산/소비체계를 만들고, 국가적 차원에서 인프라를 구축해 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등의 대안은, 향후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전체 경제구조의 전환을 위한 물질적 토대를 양성한다는 식으로 이론적 전화를 설득할 수도 있겠다만, 그거야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것이고.

세계적 지성들의 지적과 비판, 그리고 대안을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그들의 문제의식과 전망에는 귀담아 둘 내용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새롭지 않다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식상하고, 그 시도들은 이미 무수히 있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상황에서 문제는, 자본주의 대안운동의 위기이다. 그리하여 한국에 물어야 할 것은, 아니 한국의 사회운동진영에 물어야 할 것은 이 위기를 극복할 어떤 기획을 가지고 있는지이다. 기껏해봐야 자본주의체제에 산소호흡기를 물려주는 정도일 뿐인 기본소득 따위를 대안이랍시고 붙들고 있는 이 사회가 과연 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여력을 만들고는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었다.

하긴 제도권 언론에 변혁적 대안의 모색을 기획해 줄 것을 요구할 수는 없겠다. 더불어 당장 유혈의 혁명이 아니라 정치적 과정을 통한 단계적 변혁을 목표로 하는 이상, 기실 세부적 정책의 수립에 있어 저들 '지성'들보다 더 급진적 대안을 제출한다는 것도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현 상태를 '위기'로 규정하는 고래의 도식이 반복되는 건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이러한 낡은 구조 위에서 '기회'를 운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맑스의 분석에 따른다면, 결국 자본주의의 창출 그 당시부터 '기회'는 존재했던 것이고, 물경 2백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언제나 '기회'는 존재했던 것이므로 이제 또 '기회'를 이야기하는 건 그냥 뻔한 레퍼토리다. 게다가 '전환'할 준비라니? 저 '지성'들조차도 실질적으로 '전환'의 '전'자도 제대로 이야기 못하는 판에.

기자는 "보살핌의 경제"라고 하는데, 기자가 유도한 이 보살핌의 경제는 어쩌면 19세기말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망해버린 복지국가의 꿈에서 이미 설계되고 진행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북구 유럽에서 아직 유지되고 있는 사민주의 기조에 잔류되어 있는. 하긴 이 수준조차도 가지 못한 한국사회이다보니, 이것이 '전환'씩이나 될 수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만, 여전히 이 일련의 연속 기획 기사를 통해 제시된 일단의 "나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그냥 개인적 차원에서의 '소확행'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정이다.

덧: 예전부터 제시되었던 대안을 아직 실천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이 기획기사는 그 목적을 달성했을 것 같다. 남들이 이렇게 할 동안 너희는 뭐했니? 정도... "한국은 왜 안 되나?" 이 수준이었다면 수긍할 수 있었을 듯하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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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7 11:04 2019/03/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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