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최근 세간을 뒤흔들고 있는 3대 사건이라면, 김학의 사건, 버닝선 사건, 장자연 사건이겠다. 이 세 사건을 하나의 묶음으로 구성할 수 있는 건 각 사건들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양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한 자리 하고 있는 자들의 도덕적/윤리적 타락의 심각함과, 범죄행위에 불과한 이들의 행위가 그들의 막강한 지위와 이를 둘러싼 관계망으로 인하여 그동안 법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되어왔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이 세 사건에서 '한남연대'의 몰지각한 폭력을 보기도 한다. 충분히 일리가 있다. 기실 이 사건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 중 하나는 그동안 소위 '한남'들이 어떤 사고체계를 가지고 살아왔는지이다. 세계가 변했다고 하면서, 물질문명에서만큼은 가장 선진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사고방식은 여전히 18세기 가부장제의 습속과 이를 준거로 하는 폭력 네트워크에 익숙해 있는 이들 '한남'의 방조와 침묵과 혹은 공모로 이루어진 범죄들이 이 세 사건이니까.

나는 이 세 사건이 단지 고위층 일부의 일탈로 치부되고 정리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이러한 불안은 이미 이 세 사건이 그동안 그렇게 덮여져왔고, 또 그렇게 덮으려 했으며, 이 과정들이 매우 효과적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더욱 커진다. 다행히도, 어쩌면 저들에게는 불경하게도 이젠 그냥 덮기가 어려워진 상황이 되어 책임질 몇몇은 처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도교수께서는 "고위층이 일반 국민을 얼마나 개돼지처럼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라고 이들 세 사건을 규정한 바 있다. 동의한다. 주류계급은 인민들에게 도덕적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가진 것 없는 인민들의 행동 하나 하나는 일벌백계로 다스려진다. 인민은 법을 잘 지켜야 할 존재들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곤혹스러운 문제가 발생한다. 그 법은 누가 만든 법이며 그 도덕은 누가 정한 도덕인가? 다시 말해 그 법의 주인은 누구이며 그 도덕의 주인은 누군가?

위법과 타락의 일상을 살면서도 저들이 안주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법 위에 존재한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감을 가졌던 존재는 근대 이전 전제국가의 제왕 밖에는 없었다. 제왕은 법을 정하는 존재이자 법 위의 존재이다. 제왕 자신이 만든 법은 자신을 옭아맬 수 없으며, 스스로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제왕이 군림하던 체제를 뒤집어 엎은 동력은 바로 그 법 밖에서 자유로운 자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인민의 의지였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18세기말 19세기 초에 뒤집어졌던 앙시앙레짐이 작동한다. 이 세 사건은 바로 우리가 어느 샌가 시민혁명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해왔던 구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법은 보편성의 포장을 유지한다. 이 보편성이 승인될 때에야 비로소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가치가 나오게 된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가치가 일반원칙으로 인정됨으로써 법의 지배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그 법의 보편성이 위장일 뿐이라면? 표면적인 보편성 아래 실은 법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고, 그 법이 특정한 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면? 또는 그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커넥션이 강고하여 계급에 따라 법이 달리 형량될 수 있도록 조작할 수 있다면?

이 세 사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내겐 각별한 관심으로 다가온다. 법은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 즉 한국의 현행 법률들은 특정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면서 다른 계급에게는 가혹하고 주인된 계급에겐 친절한 내용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는가? 법의 집행은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 즉 오늘날 한국의 법 집행 기관은 특정계급의 이해관계를 불문하고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고 있는가? 그 법의 주인에게 유리하게, 아니 더 나가 집행기관의 구성원들이 이미 그 법의 주인된 계급의 일원으로서 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이 이 사건들의 추이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저들이 그들 계급 내부의 사람들과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 확인된 사건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타락의 도가니 속에 불려온 사람들은 쾌락의 도구일 뿐이었고 일종의 장난감일 뿐이었으며 인간적 실존에 대한 존중이나 공감 따위는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이러한 자들의 감수성을 보호하고 보장하는 법체계라면, 그것은 보편성을 상실한 법이며, 이때 이미 법 앞의 평등이라는 건 개소리로 전락할 것이고, 법의 지배 따위는 그저 지배계급의 독점적 권력행사를 위한 미사여구에 불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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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8 10:08 2019/03/2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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