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과 위법, 정치의 실종
탄핵정국에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건, 희안하게도 촛불을 광장으로 끌어냈던 질문의 핵심이 "누가 법을 어겼는가?"였다는 점이다. 결국 '적폐'라고 지칭되는 어떤 척결의 대상이 저지른 최대의 문제는 법을 어긴 것이었고, 따라서 법을 지키는 자들이 법을 어긴 자들을 응징한다는 일종의 공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거다. 이런 느낌 때문인지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촛불은 내가 그 대열 안에 있었음에도 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나는 근본적으로 법 자체를 회의하니까.
과연 503-최순실의 문제는 불법과 위법이 핵심이었던가? 이것이 핵심이라면, 그들은 그냥 재수 없어 걸린 케이스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당시건 그 이전이건, 혹은 지금이건, 법 밖에 있는 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며,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들에 대한 탄핵의 요구는 그리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다. 법을 지켜달라고, 법의 테두리 안으로 자신을 들여보내달라고 하는 요구는 외면당하거나 탄압당한다. 김용회나 톨게이트 수납노동자들을 보라. 오히려 준법을 성실히 하고, 법치주의의 이상을 믿는 자들은 대상으로 전락한다.
503-최순실, 더 나가 이재용 등의 커넥션의 문제를 위법의 문제로 한정하게 됨에 따라, 이제는 그 귀결로서 법을 지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상태의 정상성을 승인할 것이냐가 문제로 대두된다. 예컨대 오늘날 조국을 쉴드치는 사람들의 논리. 위법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문제인가? 이러한 주장은 탄핵정국의 핵심들과 조국의 명료한 대비를 만들어낸다. 법을 어긴 자들과 법을 지킨 자들의 대비. 전자는 부정되어야 하고 후자는 긍정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득세.
이 논란의 과정에서 빠진 건, 과연 그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이다. 또는 그 법은 누구의 이해를 관철하는가이다. "다리 아래서 자는 자들을 처벌한다"는 법은 누가 만들며, 그 법은 누구의 이익을 도모하는가? 반대로, 그 법은 누구를 이 사회로부터 격리하려 목적하는가?
오늘날의 문제를 합법적이었는가 여부를 따지는 문제로 국한하는 것은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폭발력을 억제하는 기제로 전락할 뿐이다. 오히려 지금, 그 법이 어떤 법이었는가, 왜 그러한 법이 만들어졌는가, 그 법은 어떤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는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환원하자면, 그러한 법체계가 형성된 사회적 계급적 동학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진단하고 전환할 것인가라는 정치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가 칼 슈미트적인 합법성과 정당성의 논리로 흘러가면서 갈채민주주의에 대한 찬양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적대로 귀결되는 것은 주의해야겠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민주주의와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제도화, 그리고 이를 둘러싼 계급 간 구도와 적대의 양상을 정치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