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정의'에 대한 단상
촛불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던 자리, 즉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던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했고, 환호했으며, 승리감을 맛봤다. 그리고 취임선서와 함께 낭독된 문통의 취임사를 천하의 명문이라고 추켜세웠다. 당연하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서 내놓는 인사인데 그게 명문이 아니면 문제지.
아무튼 그 '명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취임사의 백미라고 할만한 문장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내 입장에서는 박수칠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 페북인지 어딘지 뭔가 끄적거린 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찾기가 좀 어렵군... 암튼...
이 취임사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들이 거개가 뭐 성향이 그러하니 그러려니 했는데, 뭐라고 한 소리 하고야만 계기가 된 건 소위 '사회주의자'를 자칭했던 사람들이 아주 걍 훌륭한 말씀이라고 손가락이 닳도록 키보드질을 하는 꼴을 보게 된 때문이다. 글쎄, 과연 이게 '사회주의자'들이 박수칠 일이었는지.
그때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 이야기들은 없었던 듯하다. 어차피 내가 얘기하는 거야 뭐 장삼이사 중 하나가 뒷 골목에서 웅얼거린 수준밖에는 안 되니 별 건이라고 치더라도.
나는 사회주의자로서 이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자에게 '정의'는 '평등'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말을 사회주의적으로 전유하자면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
기회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평등할 것입니다.
왜 안 되는가? 적어도 국가라는 틀이 일정하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면, 결국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여는 그 구성원들이 어떤 삶을 살든 간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조정하는 역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진정한 평등이고 정의가 아닌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그가 대학 청소노동자이든, 화력발전소 비정규 노동자이든, 지하철 하청업체 노동자이든 관계없이, 또는 탈학교 청소년이든, 실업계 고졸이든, 2년제 대학이든, 지잡대든 출신학고에 관계없이,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성소수자이든, 청소년이든, 탈북자이든, 이주민이든 관계없이, 이 모든 사람들이 대학교수든, 정규직이든, 원청이든 근무하는 노동자들이나, IN 서울 SKY 중심 4년제 대학 졸업자나, 유수 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자들이나, 의사, 변호사, 기타 전문직종의 전문가들이나, 재벌총수나 대공장 조직 노동자나 기타 등등 잘 나가는 지위의 사람들과 먹고 사는 데 별반 차별을 느끼지 않는 사회라면 그걸로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국가라는 게 필요한 거 아닌가?
대학교 청소노동자도 시원한 에어컨이 팡팡 쏟아지는 쾌적한 자기 공간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교수의 수입과 대학 청소노동자의 임금은 기본급만으로 비교할 수 없다. 각종 연구지원을 통해 받은 연구비며 수당이며 퇴직후 받을 연금까지 비교한다면 청소노동자들이 받아가는 월급은 푼돈에 불과하다. 짬밥 좀 된 교수의 수입과 청소노동자의 월급차는 10배를 훌쩍 넘어간다.
학력의 차이는 어떤가? 대학은 나와야 사람취급하는 세상에서 고졸자 딱지를 가지곤 뭘 할 것이 없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삶을 감내해야 한다. 솔직히 대학 4년 다니면서 습득하는 기술이 필요한 일자리가 한국사회에 얼마나 있는가? 게다가 학벌의 차이라니. SKY와 그 외의 학교와, IN 서울 학교와 지잡대가 갈린다. SKY 위에는 이제 IVY리그가 있고. 국내 대학 학위는 외국의 저명대학 학위에 밀린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학문적 업적이나 교육의 능력이 물 건너가서 받은 학위와 국내 학위 간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해봐야 다 소용 없고, 결론은 그거다. 국가적 차원에서 평등을 이야기하려면 결국 결과의 평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기회의 평등 따위, 그건 그냥 수사에 불과한 거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건 그저 계급적 갈라치기를 감추기 위한 포장일 뿐이다. 이미 기회를 가질 자들이 나누어져 있는데 무슨 기회의 평등인가?
한겨레: 구의역 김군 동료 "조국 딸 논란은 '있는 사람들'의 딴 세상 이야기"
기회의 평등이라는 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자들끼리 하는 이야기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법은 그 기회를 만든 자들의 것이고, 그 법 안에서 법이 보장하는 기회를 향유할 수 있는 자들은 그 법을 만든 자들의 계급 안에 있는 자들이다. 법은 형식상으로는 몰가치적이고 몰계급적이지만 자신을 만든 자들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할 수밖에 없다.
결국 피해갈 수 없는 것은 헤게모니이며, 법을 누가 만드느냐라는 원초적 질문으로의 회귀이다. 다시 말해 문제는 계급이며, 이 계급의 대립과 갈등을 유연하게 치유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극한으로 몰고가 전복의 과정을 겪을 것이냐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면, 이제 기회의 평등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쟁논리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기만적 수사이며, 결국 '결과의 정의로움'은 결과적 평등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고 주장해야만 한다.
결과의 평등을 이야기할 때마다 듣게 되는 "그럼 공산당 하자는 거냐?"라는 반박에 대해선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결과의 평등이 공산주의라면 그게 정의다. 공산주의 해야지(물론 공산주의는 결과의 평등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만...).
더불어서, 나는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정당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말에 열광했던 자칭 '사회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