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에 대하여
문통이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던 걸 두고 가끔 이야기하는 거지만, 이건 그냥 수사일 뿐이다. '기회의 평등'은 기만이거나 아니면 제도만능론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건 완전경쟁시장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의 태두인 하이에크는 완전경쟁시장이라는 가설이 그냥 개구라에 불과하다는 걸 일찌감치 폭로한 바 있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가설 역시 개구라임은 진작에 폭로되었다.
그런데도 왜 자꾸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할까? 그건 결과의 불평등에 직면한 사람들의 변명이 가능한 아주 유력한 빌미이기 때문이다. 기회만 평등했더라도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물론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기회의 평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환상일 뿐이며, 환상을 어루만져줌으로써 현실에서의 물리적 폭력을 억제시켜주는 약물일 뿐이다. 그나마 사람들이 그 약을 빨고 살며, 문통같은 사람들이 가끔 나타나서 뽕을 팔아댐으로써 이 사회는 유지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렇게 뽕질 약질이 끊임없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바로 그 평등이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기시기마다 평등을 내건 무리들이 세상을 뒤집자고 선동을 하게 되고 그 선동이 백만번 중 한 번 정도는 성공하게 된다. 그리하여 잠깐 엎어진 세상은 찰라에 불과할지라도 사람들에게 평등이 실현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머리속 깊이 박히도록 해준 후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주체만 바뀐 채 불평등은 재구성된다. 엎었던 놈이 엎어질 놈이 되는 것으로.
조국사태에 당면한 한국에서 벌어진 공정성 시비는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다 뒤집어 엎어야 된다, 그래야 평등세상이 도래한다고 주장했던 자가 어느날 기득권 위에 앉아 특권을 공기처럼 흡입하면서도 그것이 특권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자가 되어 나타났을 때, 공정이라든가 평등이라든가 하는 가치는 개똥더미에 처박힌 개구라가 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가치관에 괴리를 일으킨 자와 처음부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충돌한다. 어차피 개싸움이지만 서로 개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분석을 삶의 일부로 삼는 자들은 이 때 자기 머리속에 정리된 내용들을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요 몇 달 간 수도 없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여다보았지만, 작금의 사태에 대하여 공정이나 평등과 같은 가치들을 적절하게 대입해 납득할만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질 못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들이 심금을 울리면서 바로 이거라고 동의할만큼의 뭔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권일이 공정성에 대하여 또 글을 냈다.
지식공유지대: 박권일 - 한국인의 공정성, 그 진짜 의미는?
나름 훌륭한 분석이다. 공정을 고집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고찰은 적절하다. 피에르 부르디외를 끌어들여 문화자본의 상속과 그것이 곧장 능력의 격차로 이어지게 되는 계급적 아비투스의 형성을 분석의 틀로 제공하는 것도 동의한다. 일전에 어떤 관종 역사학자를 까면서 이미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가 오늘날 벌어진 사태를 설명하는 하나의 기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있고.
그런데 여기서 박권일은 공정성을 세 층위로 분류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불공정성, 형식적 공정성, 실질적 공정성의 세 가지가 그것이다. 박권일은 여기서 불공정성의 예로 공정한 경쟁을 가장한 특혜로 설명한다. 형식적 불공정성과 실질적 불공정성을 설명하면서 꽤 유명한 다음의 그림을 예로 들고 있다.
박권일에 따르면 왼쪽은 형식적 공정성, 오른쪽은 실질적 공정성의 예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예를 들면서 박권일은 부르디외를 거론하는데, 내가 볼 때 부르디외를 이야기하려면 논의의 방향은 바뀌어야만 한다. 논의는 이미 담장 바깥으로 격리되어 있는 자들과 관람료를 지불하고 스타디움 안에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논의가 이렇게 시작되면 담장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정성의 형식론과 실질론의 대립에 관한 논의는 불필요한 주제가 된다.
기본적으로 부르디외가 이야기한 아비투스에 따를 때, 저 담장 안에서 관전하는 자들과 담장 밖의 관전자들은 계급에 따라, 자본에 따라 그 경계를 나누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계는 곧장 적정한 관람료를 지불하고 경기를 보는 합법적 관전자와 돈을 지불하지 않은 채 허용되지 않은 방식으로 경기를 들여다보는 불법적 관전자를 분리한다. 경기장 내부의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정의로운 시민으로 자리매김 되며 경기장 바깥의 사람들은 규칙을 위반하는 불의한 무리로 전락한다. 부모의 경제력에 힘입어 경기장 안에 앉게 된 청소년들은 법질서를 지키는 태도를 몸에 간직하게 되지만, 부모의 경제력에 기댈 희망이 없는 청소년들은 범법의 기로에서 흔들리는 위태로운 정신상태를 지니게 된다.
이때, 경기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발판을 똑같이 하나씩 가지든 아니면 제일 작은 사람에게 더 많은 발판을 제공하든 간에 이미 그들은 경기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공정성을 어긴 자들이 되며, 그들이 발판을 나누는 행위는 그 경기장 담장을 둘러놓고 이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공권력들의 입장에서 범법행위의 도구를 나누어 소지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부르디외의 논리가 적용되는 순간 발판의 나눔을 두고 형식적이냐 실질적이냐 하는 논의는 하등 쓸데 없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사회의 구조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에서는 담장 바깥에서 발판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가 논의의 핵심이 아니라, 저 담장을 어떻게 해체하여 누구나 똑같이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가 숙제로 남게 된다. 이때 비로소 능력주의라는 말이 개소리로 전락하는 일대 전회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능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구나 재밌게 경기를 볼 권리가 있고, 누구나 담장 밖으로 밀려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 공정이다. 여기에 능력을 갖다 붙이는 순간 공정은 웃음거리가 되고 정의는 소멸한다.
조국사태의 의미는 여기 있다. 공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실은 공정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것, 입으로는 변혁을 이야기하던 자들이 정작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자신들이 변혁의 대상이 되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 기회의 평등이나 능력에 따른 대우 같은 허구적 관념들이 이 사회에는 너무나 통상적으로 횡행하고 있었다는 것 등이 폭로된 것이 바로 이번 사태의 의미다.
그렇다면 이 의미를 어떻게 현실의 개선으로 승화시킬 수 있겠는가? 이제는 이 숙제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