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의 민주주의

이건 나중에 원문을 좀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뭐 동영상이라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중앙일보: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 민주 위해 투쟁한다는 사람들"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 위기, 새정치 질서를 위한 대안'이라는 제목이라고 하니 조만간 어디서 나오겠지. 정리가 되어서 나올테니 그때 보면 지금 기사를 보는 것과는 느낌이 좀 달라지겠지만, 암튼 전문이 궁금하다.

최장집 교수가 근본적으로 정당주의자이고 제도주의자이이기에 이번 기조강연도 그 수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기사를 본 소감으로 말하자면, 최 교수의 이번 강연은 '세대론'의 다른 버전 수준이 아닌가 싶다. 86세대의 능력과 자질에 대한 비판과 그들이 과잉대표하는 세대정치에 대한 불만.

이들에 대한 비판이 '진보'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되는 것 역시 세대론에 불과하다. 최 교수가 말하는 '진보파'들은 86세대 중심의 집단적 개념이고, 그가 비판하는 시민단체 역시 실질적으로 '86세대'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조직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놓고 이야기해서, 특정 그룹들의 과잉대표 내지 시민단체의 정치화가 어디 한국에서만 있는 일이며 오늘날에만 있는 일인가? 이걸 마치 한국 내의 특유한 현상인 듯 이야기할 수 있는 건지.

아무튼 난 내 주변의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리, 최장집 교수나 박상훈 대표가 이야기하는 정당론이 최소한 교과서적 기본상식을 이루는 근간이라고 여기고 있는 편인데, 갈수록 도그마에 빠져드는 거 아닌가 싶어 점점 찝찝해진단 말이지.

<추가> 아래 글은 주의장이 어디서 가져온 글인데, 덧붙여서 읽어본다. 다시 보니 그냥 개인적인 소회일 뿐이다. 다만, 내용상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부분은 비슷한 생각이다. 그런데 제목을 왜 저렇게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자아비판의 의지인지, 아니면 동시대인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불만의 표현인지. 다만, '전체주의'라는 말이 이렇게 쓰이는 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수준과는 달리 좀 빈곤해보인다. '전체주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글쎄다, 난 86의 빈한함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지만 그들이 전체주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가진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조롱받는 쪽이 스스로를 전체주의화함으로써 86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위치짓고 있는 경향은 우려한다만. 흠... 어쩌면 이 글의 필자가 말한 것이 내가 말한 그거였을까? 상대방이 가지게 되는 전체주의성의 촉진자로서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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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원 - <민주주의의 적들> 386, 전체주의성의 기원

<민주주의의 적들>
- 386, 전체주의성의 기원

1.
이렇게 제목을 달면 또 제목만 보고 흥분하는 이들이 있다. 관심받고자 붙인 제목이 아니다. 그 이상 적합한 표현을 찾지못해서다. 이건 문재인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다. 지금이 문재인 정권이라 문재인과 그의 지지자들을 비판하고 지적할뿐, 이명박 박근혜 정부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쪽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다. 다만 그것을 민주주의라 참칭하기에 더욱 비판적이게 된다.

2.
어제 하루에만 <칼 슈미트>를 두 번이나 접했다. 그는 전체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한, 나치에 이론적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법학 정치학자로 알려져 있다.(아직 그의 저작을 읽은 적도 없고 그를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대표적인 슈미트의 생각은, 정상적인 법규범이 적용될 수 없는 '예외상태'에서는 정치와 법질서의 보호를 위해 '결정하는 주권자'의 힘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
최장집 교수는 어제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 기조 강연문에서 현 집권 386과 시민운동가들이 칼 슈미트의 계승자들이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진보 대 보수, 개혁 대 수구 등 확실한 구분과 치열한 투쟁, 권력 쟁취를 지향하는 경향이 독일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과 깊숙이 접맥된다"고 말했다.

4.
SBS가 주최한 'SDF 2019 : 변화의 시작 - 이게 정말 내 생각일까'에서도 칼 슈미트가 언급되었다. 세상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본 사상가는 둘이 있었다. 토마스 홉스와 칼 슈미트. 세상을 파악하는 관점은 같았지만 해소 방식은 상반되었다. 토마스 홉스에게 사회적 갈등이란 자연스러운 인간세상의 일로 여겼고, 계약과 대의를 통해 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5.
반면 칼 슈미트에게 갈등이란 대의제, 즉 의회주의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갈등해소 방식은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고, 적의 절멸이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칼 슈미트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 강연자의 주장이 적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슈미트의 사상적 논쟁을 하자는건 아니고 대립된 두 가지의 개념을 상정하는데 목적이 있다.

6.
적과 동지를 구분는것이 정치적 행위의 시작이라는데 일부 동의한다. 다만 공동체 내부의 적은 절멸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다. 나에게 위해를 가하더라도 공동체가 약속한 룰에 근거하여 대응을 하는게 法治다. 칼 슈미트가 나치에 부역한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과 동지로 편가르고, '예외상태'에서 '결정하는 주권자'의 힘이 개입되는것을 용인하면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7.
청와대가 국정을 이끌어가는 '청와대정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적을 궤멸'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무리수를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은 그것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정의로운 일로 받아들인다. 궤멸시켜야하는 적에 대한 정당한 일, 정상적인 법규범을 적용시키지 않아도 되는 '예외적인' 악의 세력에 대한 응징으로 받아들인다.

8.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것이 있다. 민주주의자, 적확하게 의회주의자를 성선설에 기반한 낭만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의회주의자들은 인간은 선하다 보기 때문에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진한이들이다"라 생각한다. 이는 민주주의를 절반만 이해하거나 잘못 이해하는데서 기인한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성악설에 기인한다.

9.
민주주의는 휴머니즘에 기반한 제도나 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악마성과 한계성이 만들어낸 제도다. 민주주의의 미덕은 <대화와 타협>에 있는게 아니라 <견제와 균형>에 있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든 악마로 돌변한다. 적을 절멸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음은, 부르조아를 없애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것으로 이미 증명되지 않았던가.

10.
요즘 술자리 같은데서 동시대 동년배들의 대화에 끼어들기가 싫어진다. 30년전의 사고가 배인 대화를 아직도 하고 있다. 정치일선에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운동적 민주주의, 민주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구분을 못하고 있어서다. 대화 해봐야 본전도 못건진다. 내가 잘났다는게 아니다. 기본적 이해체계가 다르니 대화가 안된다. 선악의 강고한 이분법은 철판도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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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0 02:46 2019/12/10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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