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의 마키아벨리

정의당 선거결과에 대해 설왕설래가 한참이다. 그런데 그런 말들의 오고감에 대해 어떤 이는 "그렇게 신경쓰이면 경선인단에라도 들어가던가, 입당을 하던가 하고 나서 그렇게 하라"며 훈수다. 별 시덥잖은 소리들 하고 있다. 니들이 더민당 비판할 땐 뭐 니들이 더민당 당원이라서 그랬냐, 아니면 거기 뭔 투표인단이라도 하고 그랬냐? 하여튼 훈장질 완장질은 지들이 다하면서 남들 무슨 말하는 꼬라지를 못보는 것들이 있어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한국일보에 칼럼 하나가 눈에 띈다. 정의당과 더민당류가 잘 해서 '미한당' 비례진출을 최대한 막고 정치개혁의 성과를 남기라는 훈수다.

한국일보: [메아리] 보수 비례정당 표심 왜곡 바로잡으라

칼럼 형태이지만 논설위원이 쓴 글이니 이 입장을 한국일보의 공식입장으로 봐도 될 듯하다. 한국일보는 미한당류의 약진을 저지하고 더민당류가 비례를 다수 먹는 것이 "유권자의 표심을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선거 전략"이라고 생각하나보다. 이 생각의 저변에는 미한당에게 돌아가는 유권자의 표는 민주적이지 않다는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 물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서는 이와는 정 반대의 생각을 할 거고. 이 양자의 대립에서 '민주적'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이 칼럼은 마키아벨리를 인용하고 있다.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의 문제에 매달려 무엇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가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파멸로 이끌리기 쉽다."

박상섭 교수 번역본(2011) 제15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강정인 교수 번역본(1994)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이다."

어떤 번역본을 따르든 그 핵심은 간단하다. "당위에 매몰되 현실을 몰각하면 X된다"는 거다. 한국일보 칼럼이 정의당을 비롯해 더민당 위성정당 창당에 뜨악한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이다. 즉, 이 칼럼의 필자 입장에서는 정의당 등은 당위에 매몰되어 있고, 그래서 비례표가 왜곡될 수 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있고, 니들 그러다가는 X된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럴까?

마키아벨리를 들고 나왔으니 마키아벨리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으로 유명하지만 그는 동시에 로마사논고라는 탁월한 저술을 우리에게 남기기도 했다. 군주론을 쓴 사람이 썼다고 보기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로마사논고는 공화주의에 대한 엄청난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반면 군주론은 권력자는 온갖 속임수와 음모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키아벨리가 위대한 이탈리아를 꿈꾸며 메디치가로부터 인정받고자하는 개인적 욕망을 더해 군주론을 썼던 시대는 16세기 초반이다. 15세기 말부터 터진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사분오열되었고 열강에 의해 찢겨졌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고,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생각에 충실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물경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군주의 탁월함에 기대 위대한 왕국의 부활을 꿈꾸던 시대와 21세기 한국은 상황이 다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종 군주론을 거꾸로 읽게 되는데, 즉 오늘날을 시민의 시대라고 할 때, 이 시민의 시대를 거슬러 왕정복고를 꿈꾸는 반동들의 속내와 서사를 어떻게 읽어내고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탁월한 답을 제공하고 있는 책이 바로 군주론이라는 거다. 시민들을 기만하고 강압하여 공적 정치과정을 통해 사적 이해를 관철하려는 자들을 가려내는 기준이 바로 군주론에 있다고 본다.

군주론 아무 장이나 펼쳐놓고 보자. 손에 잡힌 책이 강정인 교수 본이니 그걸로 한 번 보자. "싸움에는 두 가지 방도가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법률에 의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거한 것이다. 첫째 방도는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둘째 방도는 짐승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로는 종종 불충분하기 때문에 후자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군주는 모름지기 인간에게 합당한 방도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짐승을 모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후자의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실제로는 계속해서 후자로의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전자의 방식을 표방했던 자들을 우리는 안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군주의 시대가 아닌 시민의 시대에, 우리 시민들은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 비판하고 투쟁했다. 왜? 그들은 시민을 짐승으로 취급했으니까.

이 경우 시민들은 권력자들이 자신을 짐승으로 취급하는지 아니면 시민으로 대우하지는지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건 위대한 이탈리아라는 이상이라도 있었지만 박정희나 전두환에게는 뭐가 있었을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정의사회구현"? 군주론은 이러한 명목 뒤에 어떤 개인적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개인들의 음모와 모략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군주론에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군주론을 그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아무래도 좋으며 음모와 모략이야말로 그 길이라고 가르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을 시민의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는다면, 이 시대의 구성원들인 시민들은 시대착오적으로 군주 노릇을 하려는 자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한 안내서로서 군주론은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와는 정반대로, 아직도 시민을 짐승의 수준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이 짐승같은 자들을 다스리는데에는 군주의 모략과 음모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군주론을 동원하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부산외대 이광수 같은 자. 아전인수도 유분수지 이런 자들은 그냥 사문난적에 불과하다. 이번 한국일보 칼럼이 그런 사문난적의 또하나의 사례가 될 듯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0/03/07 11:00 2020/03/07 11:00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