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적폐
한국의 기관들 중에는 현행법을 빙자해 관심법을 사용해도 뒷감당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기관이 있다. 선관위다. 선관위는 거의 뇌파검색 수준으로 선거운동의 주체와 객체, 선거운동의 목적과 행위의 결과 일체를 파악한다.
한겨레: "민생파탄" "적폐청산" 모두 투표독려에 못쓴다
선관위의 능력은 각종 선거를 거듭하면서 더욱 강력해지는데, 선관위의 능력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존재는 다름 아니라 각 정당들이며, 선관위가 관리하는 선거를 거쳐 의회로 들어간 의원들이다.
선거법이 완전 엉망진창이라는 건 호랑이 담바구 빨던 시절부터 지적되어왔다. 선거철만 되면 각 정당과 정치인들은 선거법 때문에 선거운동도 제대로 못하겠다며 징징거렸다. 그런데 정작 선거만 끝나면 국회에 입성한 자들이나 낙선한 자들이나 그걸로 대충 마무리.
다만 선거 중에 고소고발에 연루된 당사자들만 쎄가 빠지게 법원을 들락거리다가 당선무효라도 한 번 나오면 무슨 로또맞은 듯 벌떼처럼 달려드는 일이 반복된다. 이거야 뭐 곁가지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선관위가 선거에 있어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데 이게 아무래도 선관위에게 심판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보니 선수로서 필드를 뛰고 있는 선거 당사자들은 선관위가 눈 한 번 부라리는 것에도 오만 신경을 다 써야 할 판이 된다. 심판이 무리한 판정을 하거나 아예 룰에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를 판정을 해도 빡은 치지만 그렇다고 선관위 멱살을 잡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선관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목에 깁스를 하도록 만든 게 누구냐 하면 바로 이 정치인들이다. 무슨 일만 났다 하면 뻔질나게 선관위 쫓아가서 저놈 나쁜놈, 저놈 선거법 위반 고발, 저놈 어쩌구...
이짓들 하다가 사달이 난게 노무현 탄핵사건이다. 당시 선관위는 노통이 열우당 지지한다는 말 했다고 이걸 선거법위반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선관위의 판단은 헌법과 국가공무원법, 공직선거법에 다 근거가 있는 거였다. 그런데 그 근거가 애초 개판이었던 것이어서 원칙대로 하자면 헌법도 바꾸고 법률도 개정하고 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냉큼 때는 이때다라고 열우당에 뒤통수 맞았던 새천년민주당이 동 뜨고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후다닥 어깨걸면서 탄핵사태가 벌어졌던 거다.
생각해보면 대통령이야말로 가장 대표적 정치인이고, 그 정치인은 특정 정당의 힘을 바탕으로 집권한 거고, 그래서 그 정당을 여당이라고 하는 거고, 그렇다면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자당을 위한 정치적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한국 법체계는 이걸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 법들을 등에 지고 선관위는 칼부림을 하고.
물론 이런 법제가 나오게 된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자들이 준동해서 독재를 위한 명목적 절차로 선거를 악용하는 짓들을 막기 위한 차원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고, 주권자들의 역량은 쌓였다. 그럼 바꿔야지.
이런 짓들을 하다보니 뭔 일까지 벌어지냐하면, 지난 2016년 20대 총선 당시에는 박근혜가 빨간 옷 입고 TK 돌아다녔다고 선관위에 고발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더랬다. 웃기고 자빠졌다. 암튼 뭐 그랬는데.
사실 이런 식으로 선관위에게 힘실어주는 정치세력은 보수양당류만 그런 게 아니다. 군소정당이나 시민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이 뭐냐면, 중선위가 위성정당 등록허가해준 것을 문제삼는 소송이나 비례명부 수리해준 걸 문제삼는 소송. 이게 바로 중선위에게 관심법 써달라고 하소연하는 일들이다. 이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선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성토한다.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오늘도 중선위는 아주 바쁘다. 기사에서 보듯, 중선위는 민생파탄, 친일청산, 적폐청산과 같은 문구를 쓰지 못하도록 하겠단다. "시민단체나 자원봉사자 등의 투표참여권유활동은 제한없이 가능하지만, 현수막 피켓 등 시설물 설치를 통해 투표 참여를 권유할 경우 이런 정치적 내용이 들어 있으면 안 된다"는 게 선관위의 입장이다.
웃기지 않은가? 가장 정치적인 행사에서 정치적 내용을 말하지 말라니. 정당이 아니라서? 그러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말라고 해야지. 민간인은 정치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달라고 호소도 좀 하고. 하긴 '낙선운동'이 처벌되는 나라에서 선관위에게 뭘 기대하겠냐만은.
그러고보니 며칠전에 어느 유튜브방송에서 모두까기 인형이 '소비자민주주의' 이야기를 하던데, 소비자민주주의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간에 한국 선관위는 소비자고 생산자고 다 필요없고 썅 정치하고 싶음 그냥 내 밑에 꿇으라고 하는 깡다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거 다 정치인들이 만들어놓은 건 알고들 있겠지? 왜냐? 어차피 선거철 지나면 선거법 덕분에 기득권은 공고해지니까. 그냥 한 순간 눈 감고 4년간 꿀 빨아먹겠다는 심정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