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여름
하래불사하夏來不似夏라...
1994년만한 폭염이 또 있으랴 했다가 2018년에 된통 당했다. 특히나 몸도 마음도 감당하기 어렵게 바닥을 치고 있던 때에 만난 폭서였다. 원래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다보니 여름 오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헉헉거리다보니 까먹은 게 있었다.
1993년은 내 경험상 기록적으로 해를 본 날이 없는 여름으로 기억된다. 1993년 5월 29일에, 시묘살이 비스무리하게 아버지 산소 밑에 텐트를 치고 들어앉았다. 본적지인 산골 깡촌에서, 지금은 폐역이 되어버린 기차역이 있는 산 위 숲속에 텐트를 쳤더랬다.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이일 저일 전전하다가 결국 만사 귀찮아서 책이나 보자고 그랬는데.
텐트친 다음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중순이 되어 시묘살이를 끝냈는데, 지역적인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9월 초까지 해 뜬 날을 본 게 거의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보니 서울은 또 그렇게까지 해가 없는 날이 많지는 않았던 듯한데, 어쨌든 그해는 경험했던 여름 중에 가장 서늘하고 비가 많았다.
8월 말인지 9월 초인지 태풍까지 불면서, 마을 논의 벼들이 죄다 자빠졌었다. 그렇잖아도 여름 내내 서늘해서 낟알이 늦게 패였는데 태풍까지 만나 볏단들이 누워버리니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편칠 않았는데 그 논 주인장들은 아마 속이 썩어 문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놀라웠던 건 그 다음이었다. 태풍 지나가고 한 보름 남짓인 듯 한데, 여름 내내 안 보이던 해가 그동안 못보낸 열기를 한꺼번에 보내려고 했는지 엄청 쨍쨍한 날이 이어졌다. 그러자 다 파묻어야 할 것처럼 보이던 벼이삭들이 충실하게 무게를 늘려갔다. 당시 그 모습에 어찌나 감동했던지 내 삶에 대한 의욕까지 다시 충천해져서 일기에도 논밭의 모습과 내 심경의 변화를 쓰고 그랬다.
지난 연말연초에 짝꿍이 "올해는 에어컨을 놓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걱정을 했다. 실은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기 전까지도 그 고민을 했더랬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올 여름은 덥지 않을 거라고 장담을 했고, 에어컨을 놓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남보다 더위를 더 타는 인간이 에어컨 없이 버티겠다고 결기를 세우는 꼴을 보는 짝꿍은 영 미덥잖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올 여름은 아마도 에어컨 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신념의 승리를 선언해도 되지 않으려나.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으니 당연히 창문을 열어놓는 일이 많은데, 앞뒤좌우위아래 집들이 설치한 에어컨 실외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그 열기가 집으로 들어오는 건 심각한 문제다. 그렇다고 문을 닫아놓을 수도 없고...
에어컨 설치하지 않고 지나가는 여름이 가상하기는 한데, 이게 언제까지 계속 될지 모르겠으며, 이런 폭우가 이번만 오고 다신 안 온다는 보장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다시 예전의 날씨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어보여 답답하다. 백수건달이 유일하게 즐기는 낙이 산책인데, 비가 이렇게 오니 어디 산책할 염도 나질 않는다. 낙이 없다, 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