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멸종저항 활동가의 선동구호 - 한재각, 기후정의

기후정의 -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기후정의 -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한재각
한티재, 2021

‘운동(movement)’은 대부분의 경우 예외적인 어떤 것이 보편성을 획득하려 의욕할 때 벌어진다. 사회구성원의 비율 중 소수를 점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서 경험하는 불편함, 부조리한 권력에 의해 억제된 정의로움을 향한 갈망,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양극화 구조에 대한 분노 등이 그 출발이 된다.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다양한 운동은 일종의 ‘인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범주를 여정의 종점으로 상정한다. 그것이 사회적 합의이건 제도적 보장이건 간에, 적어도 ‘인정’이 이루어졌다는 건 그 운동의 주체와 의제를 사회적 예외로 배제할 수 없는 조건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므로.

그런데 장구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운동’의 고단함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안들이 있다. 노동운동, 성평등운동, 차별철폐운동 등이 그 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운동은 반전평화운동일지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안의 해결을 위해 운동을 한다는 건 운동의 주체에게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용기를 요구한다. 영영 지속될 것만 같은 사안을 앞에 두고 “아마 이건 안 될 거야”라는 비관을, 기어이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는 낙관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사람들이 최근 가장 많이 등장하는 분야가 바로 생태환경분야이며, 특히 근래 지구적 환경문제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멸종저항 운동이다.

지난 3월 15일, 멸종저항운동의 활동가들 더불어민주당 당사의 출입문과 지붕을 점거했다. 점거에 참여한 활동가 중 한 명은 자신의 행위를 “보편선험적 가치인 자연법에 따라” 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미래를 지키기 위하여 법으로 만들어놓은 선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는 인류 전체의 존재를 소거해버릴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깨끗한 환경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현행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는 공포마저 날려버릴만큼 강한 힘을 발휘한 사건이었다. 물론 내가 저 입장이었다면, “보편선험적 가치인 자연법에 따라”라는 고차원적인 이유가 아니라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불법으로 투쟁하리라”는 고전적 민중가요의 가사를 읊었겠지만.

그날 더불어민주당 당사의 출입문을 점거한 활동가 중 한 명은 그러한 투쟁을 각오하기 위해 아예 책까지 출판을 해놓고 달려갔다. “기후정의”를 쓴 한재각이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멸종저항 활동가가 쓴 “기후정의”라니 라임이 착착 입에 붙는 듯한 느낌은 물론 나만의 착각일 터이지만, 언행일치, 시종여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글을 쓰고 몸을 던진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이제 간이 오그라들고 몸도 성치 않아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 당사 점거 같은 건 엄두도 못 내는데. 훌륭한 책을 냈기에 당연히 책을 구했고, 거기에 저자 사인까지 받았고, 그랬더니 서평을 쓰라고 하니 점거는 못해도 이거는 해줘야겠다는 사명감에 뭔가 끄적여야 해서 이 글을 쓰고 저자를 칭찬하는 건 아니다.

기후정의의 내용은 이쪽 방면으로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충격적인 내용도 없고, 뭔가 확 깨는 새로운 사안을 소개하는 것도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무섭다. 다 알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들이 여전히 그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심각한 문제들을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것. 이러한 상황이 제공하는 공포는 다른 게 아니라 바뀔 가능성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절망이다. 개인은 물론이고 자본도 알고 있고, 각국의 정부도 알고 있으며, 국제사회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만 그런 게 아니라 과거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 앞으로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북극곰의 피골이 상접할 상황을 만들어갈 것이다. 멸종의 위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전 세계가 말 그대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형국이다.

두려움의 끝에 희망은 있는가? 불행히도 “기후정의”는 그런 희망 따윈 제공하지 않는다. 기껏 유나버머(Unabomber)를 끌고와서는, “개혁보다 혁명이 쉽다”고 뻥을 친다. 쉽긴 뭐가 쉽나? 그렇게 쉬웠으면 벌써 혁명을 골백번은 했지. 그런데 그래놓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솔직히 이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단다. 아니 이렇게 김새는 소리를. 게다가 이렇게 덧붙인다.

“절망과 분노가 깊을수록, 이 혁명의 절박성은 커진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최대의 적은 비관과 무기력함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혁명의 유토피아적 상상이 생존을 위해 가장 현실적이라는 점을 되새기자.” - 기후정의, 191쪽.

훌륭한 선동(agitation)인데, 과연 이러한 선동은 유토피아적 상상을 불러 일으켜 절망과 분노에 휩싸인 멸종위기종 인류를 격동하여 비관과 무기력함을 딛고 일어나 개혁보다 쉬운 혁명을 일으키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안이 있는가? 아주 오래된 문제제기인 만큼 대안도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나와 있었다. 한재각이 기후정의의 마지막 부분에 열거해놓고 있는 대안은 한재각이 이 책 쓰면서 아이디어가 솟구쳐 새롭게 내놓은 대안들이 아니다.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완전히 탈탄소화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현행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겠다는 정치사회적 결의이며, 이를 요구하고 추진해 갈 정치사회적 세력이다. 민주주의를 혁신하고 확장하려는 목표와 노력이다. 기후정의 동맹을 구축하여 전환을 거부하는 화석연료 자본주의 동맹과 맞서 싸워야 한다.” - 기후정의, 196쪽.

그렇다. 다시 운동(movement)의 대의로 돌아가 보자.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가 보편적인 사회에서 ‘탈탄소화’는 예외적인 것 내지는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다. 이러한 역관계를 전도시켜 ‘탈탄소화’의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운동이 한재각이 선동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지금까지 경과로 봤을 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듯 보인다. 사람들은 깨끗한 공기를 원하는 동시에 비행기 타고 세계일주를 꿈꾸기도 하니까. 전자는 훌륭한 일이지만 남의 일이길 원하고 후자는 환경을 생각하면 꺼림칙하긴 해도 나의 일이길 바란다. 부정하고 싶어도 이게 현실이고, 이런 현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빨리 기후위기 · 생태위기가 가속화되어 인류멸종이 현실화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기후정의가 보여주고 있는 상황은 더 덧붙일 것 없이 심각한 상황이며, 기후정의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더 늦출 수 없이 시급한 과제다. 그러므로 비관을 체질화하고 있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한재각의 선동이 더 많은 사람에게 먹혀들어가길 바라게 된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세상이 움직여서 파멸의 회로를 멈추고 절멸의 신호를 끄게 되길 갈구하는 거다. 왜냐고? 어차피 망할 거 다 망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주제에 왜 한재각의 선동에 찬동을 하냐고?

옛말에 이르기를, “먹고 죽은 놈은 때깔도 곱다”고 했다. 마찬가지 아닐까? 좋은 공기 마시다 죽은 놈은 때깔도 곱지 않겠나 말이다. 죽으면 꼭 화장을 해달라고 유언을 남길 터이지만, 입관할 때는 때깔 곱게 입관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게 기후정의를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의 이유다.

아, 그리고 이 책은 환경교과서가 아니라 정치교과서임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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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2 11:46 2021/03/2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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