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것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다.
새벽녘엔 왠지 차분해진다. 법안을 들여다보고, 청소년 축구 결승전을 보고, 또다시 법안을 들여다 보고, 그러다가 머리도 식힐 겸 이곳 저곳 웹 써핑을 하다보면 새벽 공기가 가라앉듯 마음도 착 가라앉는다. 그렇게 차분해진 마음으로 세상일을 들여다보면 대낮같았으면 육두문자에 신경질이 날 일임에도 우습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새벽에 또 우스운 일이 있었다. 찌라시 기사 하나가 사람 참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만든다. 찌라시 보면서 이생각 저생각 하다가도 종국엔 우습다. 그냥 우스운 거다.
대통령의 아들, 육사 생도출신, 상습적 마약복용 경력, 현직 제1야당 대표의 동생, 16년 연하의 연인과 결혼한 늦깍이 사업가. 박지만이다. 요즘 한참 뜨는 어떤 영화때문에 박지만도 이름값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저런 뉴스에 이름이 들쑥 날쑥 하더니 기어코 조선찌라시가 박지만과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박지만이 이렇게 이야기했단다. "돌아가신 분이 그렇게 무서운가요?" 새벽녘, 착 가라앉은 기분만 아니었다면 행인의 입에서 dog의 가족과 관련된 욕 또는 성기를 빗댄 욕설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웃는다.
죽은 박정희가 무서울리는 없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던 박정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동작동 국립묘지 쫓아가서 왕릉같은 박정희 봉분에다가 가래침을 탁 뱉어주더라도 칠성판 지고 드러누운 박정희가 일어나서 항의를 할 일도 없다. 뭐 고인에 대한 모욕이라 하여 고소당하고 위자료 물어주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만, 그거야 살아있는 유족이 할 일이고 죽은 박정희의 귀신이 하는 짓도 아니니 박정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다. 박정희를 신주로 모시는 무당도 있더라만 그거야 그 무당 사정이고.
언젠가 어느 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정치인이 누구냐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1위가 박정희였다던가? 독재에 대한 향수를 느낄 나이도 아니려니와 박정희 사후에 출생한 학생들이 상당수였을 그들이 왜 하필 가장 복제하고 싶은 대상으로 박정희를 지목했을까? 한 때 그 사건 같지 않은 사건을 박정희의 복권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이 횡행했다. 물론 그 첨병에 조선 찌라시가 있었고. 우익인사들 난리가 났으며, 이런 학생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앞날이 밝다고 희색이 만면했었다. 우습다.
만일 이 대학생들이 가장 복제하고 싶은 정치인으로 히틀러나 히로이토를 거명했다면 대한민국 찌라시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본이라면 치를 떠는(형식상) 대한민국 우익인사들, 어떤 자세를 보였을까? 아마 "시일야방성대곡"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대단히 쪽팔린 일이라며, 오늘날 학생들의 사고구조에 문제가 있으며 어쩌구 성토를 하다가 끝내 학교교육에 대한 특집기사 싣고 난리 굿을 벌였을 거다. 왜?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의 도덕성이 국제적으로 확립되므로. 나치와 군국주의는 안 된다고 해야 구색이 맞으므로.
그러나, 얼추 비슷한 수준의 박정희가 거명되는 순간 대한민국 우익들, 반만년 역사 이래 보릿고개를 추방한 위인이시며, 반공방첩 기치를 높이 들고 북한괴뢰도당과 그 앞잡이 김일성 혹부리를 막아낸 불세출의 장군이시며, 건전한 미풍양속을 고착시키기 위해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신 불후의 도덕철학가이신 그분의 행적을 드높이며 만세삼창 불렀다. 상당히 희한한 일인데, 이들은 왜 잣대를 이중으로 들고 계시는 것일까? 똑같은 독재지만 히틀러가 한 것은 죄악이고 박정희가 한 것은 지극한 선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뼈마디가 삭아가고 있는 박정희의 시신이 아니다. 죽은 박정희를 신격화하면서 박정희의 독재와 독선과 폭력과 폭압을 정당한 것으로 미화시키는 자들이다. 그들의 집요한 박정희 신격화는 박정희를 직접 겪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다시 복제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는 박정희의 어두운 그림자들은 박정희 복권운동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빛과 소금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빛과 소금을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키려 노력한다.
그리고 결국 이들은 "지식인은 몰라도 국민들에게는 결과가 좋았다"라고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한다. 졸지에 국민들은 지식인과는 별개의 존재로 전락하고 국민들은 그저 어떤 영웅이 나타나 새마을 운동과 4H클럽의 모범을 강조하며 열심히 까라고 독려하면 그저 까고야 마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된다. 이 전도된 가치관을 마치 진리인냥 포교하고 있는 박정희 교의 신도들, 이들이 유포하고 있는 전도된 가치관, 진짜 무서운 것은 바로 이것들이다.
다시 말해 진짜 무서운 것은 죽은 박정희가 아니라 박정희가 옳았다고 강변하는 살아있는 박지만이다. 그를 인터뷰하면서 교묘하게 박정희의 업적을 추앙하는 조선 찌라시다. 이 주변에 붙어서 권토중래 꿈꾸며 박정희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우익꼴통들이다. 이 우익꼴통들과 똑같은 짓을 하면서 장래의 박정희가 되길 꿈꾸는 정치 모리배들이다.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가 계속될 수록 수십년을 싸워 쟁취한 이만큼의 민주주의, 이만큼 이루어진 시민사회는 또다시 물거품이 될 것이다.
나는 그래서 천연덕스럽게 "돌아가신 분이 그렇게 무서운가요?"라며 질문하는 박지만 당신이 두렵다. 두려운 것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나마 이 새벽, 차분한 마음으로 그 기사를 봤으니 망정이지, 한참 지치고 노곤한 오후에 그 기사를 봤으면 아마도 공포에 시달리다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나 무서운지 말이다. 어린 신부와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대신 남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짓은 이제 삼가하고 말이다. 당신의 아버지에게 받았던 그 공포감이 아직도 넘치고 남는 사람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으니까.
* 행인님의 [두려운 것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다.] 를 읽다 떠오른 생각 99년에 MBC에서 몇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즌1을 준비하고 있었고 담당PD가 푸른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