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건 "경제"가 아니다

"꽃 피는 봄이 오면"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보면서 웃고 울고 진지한 감정몰입을 할 수 있었던, 개인적으로 굉장히 잘 된 영화라고 생각하는 영화였다. 어찌 보면 "브레스트 오프(brassed off)"와 비슷한 줄거리 전개일 수도 있다. 탄광촌이라는 배경에 브라스 밴드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꽃 피는 봄이 오면"과 "브레스트 오프"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브레스트 오프"는 대처정부의 폐광정책과 광업노조 분쇄정책으로 인해 파괴된 탄광촌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이 그 주제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주민들의 애정과 연대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잔잔한 어조로 보여준다.

 

이에 비해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 그려지는 탄광촌은 절망의 공간이다. 갈데까지 간 선생은 구인광고를 보고 계약직 교사로 탄광촌 학교의 음악선생이 된다. 탄광촌의 부모들은 죽거나 병들거나 떠나갔고, 남아 있는 아이들은 절망을 대물림한다. 영화는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골고루 희망이라는 선물을 선사하면서 끝난다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 밴드부 지도교사인 주인공(최민식 분)은 자식이 '딴따라'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한 아버지를 찾아가 자식에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내용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그 아버지는 찾아온 선생에게 헛짓거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장면 하나가 발견된다. 학생의 아버지가 술이나 한 잔 하라고 하면서 최민식에게 PET병에 든 소주를 따라 주는 장면이다. 그 술을 따르는 잔은 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레스 스틸로 된 컵이었다. 물론 담화를 나눈 장소가 현장 사무소였기 때문에 거기에 소주잔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탄광촌에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그 '컵'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안다. 막장 안에서 몇 십년씩 일한 사람들은 소주잔을 잡지 못한다. 손이 소주잔을 잡을만큼 말리지 않기 때문이다. 학부시절, '탄활'이라는 지역활동을 들어가서 만난 광산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소주잔을 잡지 못했다. 그들은 사발이나 밥공기, 또는 영화에서 보던 그 잔으로 술을 마셨다. 당연히 행인도 그렇게 마셨다. 한참 술마시고 돌아다닐 때라 잘도 퍼마셨더니 광부'아저씨'들이 술마시는 것만 보면 광부해도 되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어쨌던 그들의 손이 소주잔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노동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가를 웅변한다. 채탄 작업을 위해 굵은 곡괭이와 삽과 굴착기를 움직이고, 탄차를 밀고 당기고, 막장을 받칠 침목을 대고 하는 동안 그들의 손은 더 이상 작은 잔을 잡을 수 없게 굳어져 버린 거다.

 

그렇게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척박하다. 석탄산업합리화정책 이후 탄가루로 가득찬 폐와 몇 푼의 지원금을 손에 쥔 채 막장인생의 끝을 본 사람들도 있고, 그나마 살던 터전이라고 계속 있어보지만 희망의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탄광촌 검은 폐수를 끼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의 성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경제가 성장되는 만큼 그 성장의 밑바닥에서 손의 근육이 경직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성장의 효과가 돌아가는지도 의문이다. 그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성장을 위해 업보처럼 진폐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성장의 과실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력을 상실하자 마자 또는 경제성을 상실하자 마자 그들은 일터를 잃었고, 그렇게 잊혀져간다.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 제주도지사에 출마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전경련 상근부회장까지 역임한 전문 경영인 출신이다. 항간에는 삼성이 의도적인 정치적 전략으로 자사의 인물을 정치권에 배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나보다. 그것이 현명관 제주지사 예비후보의 말처럼 "엄청난 상상력"이던지 음모론의 일종이던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의 생각이 중요하다.

 

그는 전형적인 시장자유주의자다.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것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사유재산제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하는 그는 현재의 경제상태가 위기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장위주의 정책을 펴야 하며 따라서 감세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자신의 뜻과 맞기 때문에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공천을 받겠다고 한다.

 

현재의 경제상태가 위기라는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위기가 자본의 축적과 잉여이윤의 창출의 부진에 의한 문제라면 그건 동의하기 어렵다. 파이를 키워야 먹을 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개발독재가 시작되기도 전에 횡행하던 이야기고 그 이야기가 물경 반세기 가까이 자동반복 테이프레코더처럼 재생되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놈의 파이를 키워야 하는가? 도대체 어느 만큼이나 파이를 키워야 분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건가?

 

기본적으로 현명관은 돈이 남아 돌아야 분배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판단하자면 분배는 지구 종말이 올 때까지 불가능하다. 지금 현재 상황에서 과연 이 땅에 물자가 모자라 문제가 생기고 있는가? 차라리 그렇다면 속이나 편하겠다. 어차피 없는 거니까 생각도 나지 않을 거고. 하지만 상황은 정 반대다. 돈과 물자는 사실 남아 돌고 있다. 그것들이 일부 기득권자들의 주머니 속에서 그들만의 배를 불려주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못가진 자들의 소외감은 단지 추상적인 감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빈부격차로 인해 발생하고 있다. 지강혁이 벌써 17년 전에 부르짖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비통한 절규는 지금 더욱 절실하다.

 

제주도를 싱가포르에 비견되는 동북아 중심의 글로벌 아일랜드로 만들겠다는 현명관 제주지사 예비후보의 일성은 그래서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두려운 이야기다. 지금은 '경제'상황이 위기가 아니다. 진짜 위기는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들이 점점 최악의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꽃 피는 봄이 오면"의 배경이 되었던 탄광은 이제 강원도 정선 태백 일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참고로 매우 암울한 기사 하나 또 떴다. 경제위기라고 난리가 났던 IMF 이후 지금까지 도대체 그놈의 위기론으로 돈 번 인간들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한 눈에 보여주는 통계가 나왔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도시근로자의 봉투는 점점 더 크게 구멍이 났다. 그 와중에도 현명관 같은 사람의 말빨은 또 먹혀들어간다. 제주도도 걱정이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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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7 13:11 2006/02/0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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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용도 서울시장 나오고, 이건희도 대통령 출마하고... 그래서 삼성놈들이 다 잡으면 혹시 파이좀 커지지 않을라나요? ㅋㅋ
    양극화 더 빨리, 더 신속하게 진행시켜서 '삼성<->한국'으로 양극화되면 탈출구 좀 보이지 않을라나요?

  2. ㅋㅋㅋ 파이는 커져도 먹는 넘들은 그넘들이겠죠. 머. 얘들은 아마도 한쪽 극을 아예 없애버릴려나 봅니다. 굶겨 죽이든지 말려 죽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