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횡단열차

철이와 메텔을 싣고 끝도 없는 우주를 질주하던 "은하철도 999"는 어린 시절 꿈의 보고였다. 머리가 좀 큰 다음에야 이 에니메이션이 한 순간 짧은 생각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매주 일요일 아침 늦잠꾸러기 행인을 여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만큼의 마력을 가진 이 에니메이션을 보면서 메텔 같은 누나가 있었음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행인이었더랬다.

 

"은하철도 999"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차에 몸을 싣고 몇 박 며칠간 대륙을 횡단해보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부산에서 출발해 저 먼 서쪽의 끝 그 어딘가까지 칙칙폭폭하며 가보는 것은 지금도 가지고 있는 황홀한 희망 중 하나다. 버스여행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버스보다 기차가 더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차 안에는 화장실이 있다는 거다... 몸상태가 별로인 날은 버스타고 화장실 문제때문에 매우 힘겨운 사태가 발생한다. 과민성대장증상으로 언제나 시름하는 행인은 그런저런 생리적 문제점 때문에 버스를 탈 때는 아직도 조심하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으흠...

 

대륙횡단열차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졌던 희망은 곧장 산산조각이 나버렸었다. 155마일 휴전선 이북에 "북한괴뢰도당"이 따발총을 들고 서 있는 한 기차 타고 그 북쪽으로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반공소년으로 거듭난 행인, 김일성 아바이 동무가 그렇게 미웠더랬다. 뭐 다 어린 시절에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어릴적 꿈이 단순한 꿈으로 끝나지 않고 실현가능한 이야기인 것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DJ의 열차편 평양방문이 논의되고 있고, 이에 즈음하여 철도공사 사장 이철은 언론사와의 대담을 통해 남북철도연결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단번에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지정학적 위치가 변하든 어쨌든 그거야 나중에 계산기 뚜드려보면 알 일이고, 일단은 어릴적부터 간직했던 꿈이 혹시나 조만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를 갖게 한다. 돈 많이 모아놔야겠다... 지금 당장 개통되도 금전관계상 꿈을 이루기에는 '택'도 없으니까...

 

일단은 그렇게 희망이 생기다가도 껄쩍지근 한 것이 갑자기 서글퍼진다. 그렇게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면, 행인은 맘편하게 행인노릇 해가며 대륙간 철도를 타게 될까? 아마도 그 열차, 비행기와 맞먹는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터이다. 그 서비스 제공하는 사람들, 지금 한참 싸우고 있는 KTX 승무원들처럼 비정규직 계약직 노동자들이 하게 될까? 계약직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고용상황을 밟고 앉아 편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까?

 

철도공사 사장 이철이 새벽바람에 강금실 후보 사무실을 찾아 KTX 노동자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았다. 오고가는 이야기가 참 답답하다. 자리가 없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이게 다다. 대륙간 철도라는 웅대무비한 포부를 설파하시는 철도공사 사장님께서 도대체 KTX 승무원들의 문제에 대해선 이리도 쪼잔하게 구실까... 고용과정의 계약문제야 워낙 심각하게 알려진 사실이라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만 짚어보자.

 

아닌 말로 서비스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그 질적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예절교육 좀 시키고 안전교육 하고 교본 달달 외우게 만든다고 해서 서비스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년간의 실무와 여기서 쌓인 노하우의 체계적 전수, 적절한 위기관리능력의 배양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체계 구성. 이런 것들이 전제되어야 서비스의 질이 높아지는 거다. 아닌 말로 "고속철도의 꽃" 노릇만 하라고 KTX 승무원들 뽑았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사람 뽑을 이유가 없다. KTX 타는 사람들이 그거 "꽃"놀이 할려고 타는 건가?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고용상의 불안감, 그리고 실제 파리목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고용불안의 현실 속에서 과연 충분한 서비스, 이게 가능할까? 노하우의 전수? 개코나 짤리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임금 좀 오를라치면 짤라버리고, 그런 상황에서 무슨 노하우의 전수가 있을까? 항공기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간혹 스튜어디스를 비롯한 승무원들의 침착한 대처로 대형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 침착한 상황대처가 몇 번의 교육과정 수강으로 가능할까?

 

서비스는 그냥 어느 순간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전문직종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쌓여진 내공이 있어야만 자연스럽게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서비스가 보장된다면 대륙횡단철도 기분좋게 타고 다닐 수 있겠지만, 몇 날 며칠을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엉성한 서비스때문에 기분 잡치게 되면 차라리 비행기를 타지 누가 기차 타나?

 

KTX 승무원들이 끌려가고 농성장에서 찬밥신세를 면치못하는 상황에서 이철 사장의 인터뷰는 끝없이 공허하다. 그렇게 철도 뚫어서 "지정학적 위치를 단번에 바"꾸는 것에는 엄청난 고뇌를 하시는 분이 왜 현실에서 아우성치는 저 아픈 목소리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차갑게 얼어붙어버리는 걸까? 뜨거운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투사 이철이 사장이라는 감투를 쓴 상태에서 보여주는 이 냉정함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나?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내가 어리석은 건가?

 

대륙횡단열차의 꿈이 창공을 나르고 있을 때, KTX 승무원들의 눈물은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간다. 새삼 "은하철도 999"에서 눈만 반짝이던 차장이 떠오른다. 인간이 아닌 그 차장은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서비스는 "엄마 잃은 소년"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정도로 따뜻하고 아름답다. 그가 계약직이었을까? 아, 인간이 아니기에 고용계약이 필요없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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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16:56 2006/05/1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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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고보니 3월 달이었죠? 철도노조파업에 들어갔을 때도 은하철도999를 만평으로 해서 "철아~" 하고 차장이 울고 있고 철이 손에는 비정규직 은하계가 들려 있던 모습이 떠오르는건 웬지 >_< 크... KTX 여승무원들 전원 연행 되셨다던데... 이게 무슨 짓거리인지... 세계노동기구에서 직접개입하겠다고 밝혔다고 하는데 이게 우리나라 노동 환경의 현실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직 민주화의 길이 멀었다는게... 여실히 느껴지는 오늘입니다.. 에휴 ㅠ.ㅠ

  2. 저번에 부산에서 형근이랑 싸울 땐 그리도 민주투사마냥 행세하시더니 결국엔 다 자기 자리 찾아가게 되는군요. 사람이 원래 그런지라 처세가 저리되는지, 아님 자리가 사람들 저리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가장 보고 싶지 않은 형태로 저 사람 이름 두 자를 재회하게 되네요. 이 사람 그 사람 맞죠? 지금도 잘 안 믿겨요. 어이가 없어서.

  3. 에밀리오/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고 이제 고용의 안정이라는 것은 물건너간 이야기처럼 비춰지는 현실이죠. 신자유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지만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비이성적인 모습인데, 이게 언제라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철밥통들은 모르죠. 갑갑합니다.

    정형근/ 그렇죠. 맞습니다. 바로 그 이철이 지금의 이철이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기 보다는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한계가 아닌가 합니다. 전두환의 청문회에서 명패를 집어던졌던 노무현이 전두환과 오버랩되는 현실. 사실 그가 던진 명패가 그의 한계가 아니었나 하는 거죠. 정말 어이가 없는 현실입니다.

  4. 그러게요 ㅠ.ㅠ 정말 그래요 ㅠ.ㅠ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