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행군

이뿐 조카가 있는데, 촌수를 따지면 상당히 복잡해지지만서두^^;;; 암튼 이 조카가 학교 축제 중에 학내 전동휠체어마련 및 대여사업을 위한 기금마련 주막을 연다고 했다. 우찌나 기특한지, 어찌 아니갈 수 있겠는가? 없는 주머니 탈탈 털어서, 다른 정책연구원들 주머니까지 훑어서(그래봐야 기껏 몇 만원이었지만) 갔다. 삼춘이랍시고 뭐 별 시덥잖은 처지라 기냥 가서 어깨나 함 두들겨 주려고 한 거다.

 

행사준비하는데 고생들이 많았던 거 같다. 일단 위로와 격려를. 뭐 주막 이틀 해봐야 수익금 몇 푼이나 남겠나?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뭔가 알려나가고 준비를 하고 사람을 만들고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람이 많이 남길 바란다. 고생한 조카와 그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나중에 밥이나 한사발씩 먹여줘야쥐.

 

건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이 대학이라는 곳들이 뭔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자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 이거 매우 중요한 일인데, 왜 이런 일에 이토록 둔감한 걸까? 이동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고, 엘리베이터 없는 곳이 거의 대부분이고, 아예 중증장애인,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들 같은 경운 학교에 다닐 수조차 없도록 만들어 놓은 형편이다. 학교가 이모양이나 다른 시설은 안 봐도 그림이다. 아닌가??

 

교수님들 뵙고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평택관련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실무적 차원에서 어떻게 진행을 해야할 것인지 등의 문제가 남았는데, 상당히 무력한 감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 그냥 떠드는 정도로 대응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

 

그리고 주점 자리에서 이재유님을 만났다. 여러 이야기를 했다.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너무나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메일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연이 닿은 사이였는데, 그 자리에 와 있는 거다. 처음 메일을 주고 받을 때는 매우 어린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젠 우람한 장정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우찌나 반갑던지...

 

여튼 여기까진 오밤중의 대장정을 위한 서곡에 불과했다. 이래 저래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막차시간이 되서 허겁지겁 전철역으로 입장. 광명까지 가야 되는데 마침 막차가 들어오길래 얼른 집어 탔다. 그러나 아뿔사, 7호선 막차는 광명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신풍역에서 종착이었다. 광명까지는 5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데...

 

택시를 탈까 하다가 달빛이 너무 좋아 에라, 모르겠다 하고서는 걷기 시작했다. 오밤중에 걸어서 집에 가는 것이 얼마만이냐.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밤중 풍경도 보고, 게다가 살짝 배부른 달이 오늘따라 왜 이리 아름답게 보인다냐 하면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걷다가 깨달은 건데 7호선 역 구간이 상당히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을 제대로 못 찾은 탓도 있고...

 

그렇게 걷다가 남구로역 쯤 왔을 땐데, 앞에서 두 명의 시커먼쓰가 나를 보면서 싱글벙글 하고 있는 거다. 어라, 이게 누군가 하고 봤더니 서울시당 위원장과 정책담당자였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즈음이었는데, 선본에 있다가 이제 퇴근하는 길이란다. 반갑기도 하고 오밤중에 광명까지 걸어간다는 것이 머쓱하기도 하고 했지만 어쨌든 묘하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낯선 길을 예정에도 없이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오밤중 거리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 새벽에 개끌고 나와서 산책을 하는 할아버지, 어딘가에서 운동을 하고 오는 것 같은 운동복 차림의 아줌마, 술 먹은거 다시 꺼내서 확인하는 사람, 밤샘 영업을 하는 손짜장집 주인의 피곤한 모습,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운전사, 뭔가로 다투고 있는 연인, 순찰돌고 있는 경찰관, 길거리에서 누워 자고 있는 양복쟁이...

 

유흥가 앞에는 말 그대로 불야성이다. 꺼지지 않는 네온, 호객을 하는 삐끼들,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여성들, 고성방가하는 주정꾼, 여친의 등을 두들기고 있는 남친(이들이 친구사인지 뭔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냥 그렇게 보였다), 싸우는 사람들...

 

다정히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가는 연인들이 있었고, 은은한 나트륨등 아래서 진한 입박치기를 하고 있는 연인도 있었고, 여자친구를 택시에 태워보내는 남자도 있었고, 남편에게 정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으로 곰살맞게 구박을 하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그래, 뭐 사람사는 세상이 원래 이런 거 아닌가? 혹시 난 그동안 책상머리에 앉아 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내 주관에 따라 재단질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가? 혹은 내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거품물며 악을 썼던 일들이 사실은 이 사람들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들이 아니었을까? 이래 저래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생각이 복잡해지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뒌장,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 거다. 보니까 광명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신풍역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완전 길을 잘 못 들어서 영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이거 어디로 가야하는지 황당해졌다. 하필 일대가 불꺼진 공장지대라 어디 가서 물어볼 곳도 없고. 결국 이곳 저곳 뺑뺑이를 돌다가 겨우 광명방향 표지판을 발견하고 다시 길을 잡았다.

 

한참 가다 보니 낯이 익은 거리다. 신호등 저편 공장 앞 가건물에 선명하게 보이는 구호들. 하이텍 알씨디였다. 황량한 공장하며, 찌든 현수막들이 그 치열했던 투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긴 뭐 여기 뿐이랴. 이 가리봉 오거리 일대 그 수많은 공장들 중에 아픈 패배의 추억을 간직하지 않은 곳이 몇 개나 있을까? 그 패배를 딛고 다시 투쟁을 결의하던 노동자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그 노동자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몇 블럭만 더 내려가면 내가 일하던 공장도 있는데...

 

그렇게 구로공단을 지나 철산으로 넘어와 광명엘 들어왔다.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 반. 약 7.2km 정도를 걸었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20분쯤. 다음번엔 런닝복과 런닝화를 착용하고 뛰어서 와볼까... 뭐 그렇게 힘들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야간행군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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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7 13:41 2006/05/1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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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와... 뭐랄까 와 닿는 이야기랄까요 >_<: 아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험 해본 적이 있어서리 ^^; 아하하; 그나저나 나중에 대추리 잠입할 껄 생각해서 나침반 들고 야밤에 산타는 연습을 해볼까 생각도 중이라니;; 이게 뭔 소린지;;

  2. 그날 만나봬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즐겁기도 했고요^^. 다음에 뵐 때는 좀더 오랬동안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3. 에밀리오/ 흠... 실미도 특수부대원 훈련은 말리고 싶습니다... 쩝...

    이재유/ 예, 이재유님도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4. 삼촌의 우여곡절은 전혀 관심없는 채...
    매일 제 얘기..제 불만..제 미움만 앵앵거리네요^^
    그래두...사랑해용!!ㅋㄷ

  5. 조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