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신불

행인은 산을 좋아한다. 게으른 탓에 자주 가지는 못해도 언제나 마음 속에 산을 품고 산다. 구비구비 휘몰아치는 능선이며, 모든 것을 안아주는 계곡이며, 철철이 옷을 갈아 입는 나무들이 곱고, 때맞춰 제 아름다움을 뽐내는 옷갖 기화요초가 묘하며, 이골 저골에서 울어예는 새들의 노래소리 울려대는 산. 거기에는 먹고싶을만큼 먹을 수 있는 물이며 나물이며가 있고, 다람쥐, 청설모, 노루, 멧돼지, 너구리, 족제비, 오소리, 고라니들이 있다. 울창한 숲 속 축축한 돌틈 밑으로 두꺼비며 개구리며 도마뱀이며 도롱뇽이며 이름도 모르는 온갖 곤충들이 산다. 통채로 우주가 들어 있고, 통채로 삶이 들어있다. 그래서 산이 좋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수사는 단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곳 저곳 산을 다녀보면 참 이 말만큼 이 땅의 강산을 제대로 표현한 말이 없다싶을 정도니까. 어느 산이고 어느 골이고 그곳만의 정취가 있고, 그 곳만의 역사가 있다. 이름이 알려진 큰 산들은 물론이려니와 한 번 들어본 적도 없는 산이나 아예 동네사람들조차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산에서도 자연의 숨결은 넉넉히 살아 숨쉰다. 발길에 닿는 곳 어디나 산이 있고, 그 산들이 아름답고, 그래서 산골짜기 출신에 산밖에 없는 곳을 고향으로 둔 행인은 지금도 산에 물리지 않고 산을 보면 행복하다.

 

바닷가는 지금까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는 가지 못했다. 바다 역시 무척 좋아하면서도 어찌어찌 하다보니 바다로는 발길을 잘 돌리지 않게 되었다. 그건 아무래도 바다로 가면 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있어야하지 않나 하는 강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선천적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행인의 기호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아예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 모를까. 아무튼 그렇게 지나온 날들은 산에 더 가까운 생활이었다.



그런데 예전에 잘 가던 산을 이제는 잘 안가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너무나 사랑하는 산, 지리산. 눈을 감으면 지금도 지리산 곳곳이 떠오를 정도로 지리산은 행인에게 아주아주 큰 꿈이다. 그런데 잘 가지 않게 된다. 갈 때마다 지리산은 어딘가 한 구석씩 잘라지고 깨져나갔다. 심마니길을 풀섶을 헤치며 다니던 그곳에 임도라는 것이 생겼고, 화엄사에서 꾸역꾸역 올라갔던 노고단 바로 밑에까지 차들이 올라온다. 관통도로라는 것이 생겼고, 댐이 만들어지고 있고, 골프장이 들어서고 있다. 그래도 지리산은 아직 낳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가지 않게 된 산은 덕유산이다. 덕유산은 이제 예전의 덕유산이 아니다. 케이블카가 들어섰던 것까지는 그래도 괞찮았다. 거기 스키장이 생기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리조트가 생기고 국제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산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덕유산은 가지 않는다. 추억속에 덕유산을 남겨두는 것이 덕유산에 대한 행인의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에.

 

제천, 영월, 단양일대를 돌다보면 시멘트 원석을 캐는 노천광산이 보인다. 석탄캐는 광산과는 달리 시멘트 원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산 꼭대기부터 산을 깎아 내려와야 한다. 주변의 푸른 숲을 자랑하는 산들 속에서 깎여져 나가는 산들의 모습은 흉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그 산들은 깎여 종국엔 들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진 시멘트는 도시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산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강원도 일대를 돌다보면 높은 산 위에 엄청난 규모로 박혀 있는 송전탑을 보게된다. 전기를 쓰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그 송전탑의 크기와 규모, 그리고 숫자를 보면 그 크고 많은 송전탑을 놓기 위해 쓰러져야했던 나무들과 파헤쳐져야했던 바위들의 규모가 대충 견적이 나온다. 어디 그뿐이랴. 경치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골프장이 들어선다. 지역경제활성화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들어서는 골프장은 산 봉우리 한 두개는 가볍게 없애버린다. 산들이 도로와 철도를 위해 허리가 잘려나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과하다싶을 정도로 밀어내버리는 일들이 흔하다.

 

산들이 이렇게 부서져 나가는 동안 그 산을 의지해서 생존을 영위하던 뭇 생물들 역시 죽어나간다. 산을 뚫어 만든 도로를 지나다보면 작은 동물들이 쥐포처럼 납작하게 눌려 살들은 다 빠져나간 채 가죽만 아스팔트에 떡이 져 붙어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가죽들을 잘 살펴보면 종류도 가지가지다. 날개날린 날짐승들의 가죽도 있고, 고양이, 토끼, 족제비 가끔 가다가 꽤 덩치가 되는 너구리의 가죽도 볼 수 있다. 핏자국만 선연한 곳도 많이 있는데 이런 경우의 상당수가 노루나 고라니 같은 덩치 큰 짐승이 죽어나간 자리란다.

 

산들이 없어지고 나무들이 사라지면서 물도 마른다. 보기에는 굉장히 큰 하천이 있었을 자리처럼 보이는 곳에 물이 없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수로직화사업결과 시골의 하천들이 직선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동안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물을 품었다 풀어주어야할 숲이 사라지면서 하천이 말라붙는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그 물을 마시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마실 물이 사라지면서 상수도를 끌어와야 했다. 그 상수도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에서 역시 물이 부족하게 되어 가뭄이라도 들어버리면 당장 먹을 물을 걱정해야하는 지역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산을 깔아 뭉개는 것은 결국 인간을 깔아뭉개는 것이다. 그렇게 깔리고 뭉개진 인간들의 삶은 점점 척박해진다. 산을 지켜야하는 이유다. 더 많은 산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다. 그것을 알기에 행인은 부서져 가는 산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눈을 돌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산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행인은 내 삶의 행복이 그렇게 자꾸만 줄어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행인이 많은 산을 돌아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름자 걸려있는 산들은 꽤 가봤던 편이다. 그런데 아직 천성산이라는 곳은 가보질 못했다. 그리고 그 산 습지에 사는 온갖 식생들을 만나 인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천성산 도롱뇽들도 못봤다. 그런데 그 산이 뚫리게 되면서 이 식물들과 동물들이 죽어야 한다. 도롱뇽들을 대신해 소송도 내어봤지만 공적쌓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의 욕심때문에 산을 갈아엎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갸냘픈 몸을 한 한 스님이 뭇 생명들과 생을 함께 하고자 42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자비로 그 생명들을 구하지 못한 구도자의 업보를 이들과 함께 죽음으로서 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이 42일을 굶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해봤다. 행인은 42일은 커녕 42시간만 굶으면 아마 빈사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42일이라는 숫자는 단지 며칠이라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어떤 부처님이 극락에 드는 것을 거부하고 고통받는 중생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다면 축생지옥에서 그 고통을 함께 하겠다고 했다던가. 생사를 초월하여 42일을 단식하고 있는 지율스님이 그 부처의 환생은 아닐지 모르겠다. 마음같아서야 "스님 이제 그만 하시죠"라고 하고 싶지만 목구멍 너머로 그 말이 흘러나오지 않는 이유는 지율스님이 진행하고 있는 지금의 행위가 단지 인간들의 이해관계로만은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등신불을 요구하는 이 땅의 현실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언제까지 우리는 등신불의 성총을 입어 자기 죄를 구원할 것인가? 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업보를 거두지 못하는 것일까? 꼭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앉은 채 숨을 거둬야 다만 한 번 눈길이라도 줄 것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4/08/10 15:36 2004/08/10 15:36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55
    • Tracked from
    • At 2004/08/11 16:15

    행인님의 글을 보면서.... 자연에 대한 단상에 대한 흔적을 남겨봅니다. 아마존을 녹색의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기피해온 우리의 문명사가 만들어낸 잘못된 文語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