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슨(Benson)산 등정기

리우스님의 [점입가경] 에 관련된 글.

리우스님이 올려주신 산의 모습들을 보자 손꾸락이 근질거려 트랙백을 검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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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Peace Forum의 일정이 끝나고 비행기 타는 시간까지 하루 정도 시간이 비게 되었다. 해서 행사지 근처에 있는 빅토리아섬의 나나이모라는 곳으로 갔다. 후배의 집이 거기 있어서 살짜쿵 방문을 하려는 것이 목적. 원래 이 후배가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서울 떠나기 전 막판에 배신의 똥침을 놔버렸다. 해서 후배도 없이 후배의 집으로 가기로 하고 출발. 객지에 나와선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는 거다.

 

해서 빅토리아 섬으로 출발. 페리를 타고 2시간 가량 들어가야 한다. 헐리웃 영화에서만 보던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중간에 페리를 승선해야 한다. 이게 왠 호강이란 말이냐... 그레이하운드 버스에는 화장실도 있다. 물론 시설이야 쌔끈발칙한 정도는 아니나 고속버스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으로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페리를 타고 지나가는 연안의 모습은 흡사 남해의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지나는듯 하다. 섬도 무진장 많고 바다 색깔도 연안은 붉은 색이었던 것이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퍼렇게 바뀐다.

 


페리에서 바람맞고 있는 행인

 

온갖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페리에서 커피 한 잔 받아 들고 갑판에 나와 섬과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다. 한 마디로 기분 째진다...

 

이렇게 저렇게 나나이모에 도착. 후배의 동생이 차로 데리러 나왔다. 지도상으로 보면 동네가 그리 큰 거 같지 않은데 꽤 넓다.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서로 인사도 하고 이것 저것 물어봤다. 섬인데도 불구하고 집들이 해변에 많고 게다가 죄다 목조건물이다. 그래서 이 동네에는 태풍같은 거 안부냐고 했더니 그런 건 없단다. 좋겠다... 원래 뱅쿠버의 날씨가 이렇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이상기온이란다. 나중에라도 여기 와서 살까 했는데 잠깐 망설임이...

 

집으로 향하는 길의 차창 밖으로는 역시나 여유 있는 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고층 아파트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시야가 탁 트이니까 이렇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렇게 넋을 놓고 차창밖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는데 눈 안에 산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 험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그닥 높아보이지도 않는 산이었다. 관악산 높이쯤 될라나...

 

"야, 산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후배의 동생이 벤슨(Benson)산이란다. 나나이모에서 제일 큰 산이라고 한다. 뱅쿠버섬 내의 다른 지역에는 훨씬 높은 산도 있는데 아무튼 나나이모 최고봉이란다. 한 번 가봤는데 길을 잃어서 헤맨적이 있다고 했다. 곰도 나온다고 한다. 행인, 산에 한 번 가보고픈 욕심에 내일 저기 가자고 꼬시기 시작했다. 동행했던 넘도 뭐 그러자고 답했는데 다만 운전을 하던 후배 동생은 별 말이 없다.

 

후배집에서는 과분한 환대를 받았다. 어머니께서는 만찬을 준비했는데 한국형 잔치상이다. 과일이 풍성하게 놓여졌다는 점이 조금 달랐을 정도? 조용한 동네에서 별도 엄청나게 많이 보이는 저녁에 배가 째지도록 밥도 먹었으니 더 원할 것이 없었다. 처음 집에 도착했을 때 후배 아버지가 마음 놓고 지내라고 하시면서 덧붙인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동네엔 도둑이 없어요."

 

나나이모의 후배 집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도둑 대신 사슴이 있었다. 누가 기르는 것이 아니라 지들이 이집 저집 드나들면서 동네를 돌아다닌다. 큰 사슴도 있었고 아마도 새끼인듯한 사슴도 있었다.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집 정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새끼사슴

 

암튼 그렇게 저녁을 보내고 날이 밝았다. 또 아침 푸지게 먹고 잠깐 산책. 점심나절에 후배 동생 둘을 꼬셔서 벤슨산으로 직행. 원래 계획은 가비얍게 등산 한 판 땡기고 난 후 나나이모의 해안가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생만사 어디 맘 먹은 대로 진행되는 것이 있던가... 이로부터 고난의 벤슨산 산행기가 시작되는 도다...

 




문제의 발단은 가이드가 산을 잘 몰랐다는 거다. 후배의 막내동생이 가이드를 맡았다. 어제 차로 우리를 데려갔던 그 동생이다. 한 번 가봤다고 하니 뭐 잘 알겠지 하는 마음이 그 친구나 우리들이나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넘의 벤슨산이 한국의 산들과는 너무 틀렸다는데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등반을 위해 차를 주차시켰다. 그런데 산과는 너무 먼 곳에 차를 세우고 말았다. 물론 그 때까지도 그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차를 세운 곳이 벤슨산의 한 자락이라고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곳은 산 정상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실제 거리는 비교하자면 보라매공원에서부터 관악산 등반을 시작한 정도였으니까...

 

산까지 접근하는데만해도 거리가 상당한데, 주차한 곳에서부터 길을 몰라 헤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로 지도상에 나온 전망대가 나오길래 아, 산이 무척 작구나라고 착각을 했다.

 


전망대에서 우리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후배의 큰 동생

 

아무튼 여기까지는 좋았다. 초반에는 힘도 있고 산도 그리 크지 않다고 철석같이 믿는 바도 있어서 즐겁게 산을 탔다. 나무들이 장대하다. 한국 산에 있는 나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단 나무들이 수직으로 곧게 자라있는 데다가 그 높이가 예사롭지 않다. 자빠져 있는 나무들만 봐도 키가 40m는 족히 되는 것들이다. 굵기가 엄청난 나무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마 이 동네 집들이 죄다 목조건물인 것은 이렇게 풍부한 목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자빠진 나무 중간까지 올라간 행인(웃통 벗음 ㅋㅋ)

아무튼 요기까지는 웃고 떠들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난데 없는 호수를 발견.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짓던 일행들, 마침 소풍 나온 한 가족을 발견하고 가서 물어보았다. 설명을 해주는 그 아저씨의 표정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이러저러 설명을 해주시는 아저씨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우리의 가이드도 표정이 심각해진다.

 

길을 잘 못 들었단다... 완전히 잘못 들었다는 거다. 그래서 설명 들은 대로 꾸역꾸역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사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 나왔다. 길은 넓고 좋다. 그런데 그 길을 내기 위해 넘어진 나무들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파온다. 저 장대한 나무들이 기냥 다 자빠져 있어야 하다뉘...

 


벤슨산자락에 있는 오솔길

 

꽃도 이쁘고 풀도 이쁘다. 신기한 것은 이 동네에서 자라는 민들레는 우리 산이나 들에 피어나는 민들레보다 훨씬 크다는 거다. 키도 크고 꽃도 크고... "이게 무슨 민들레여, 해바라기지..." 할 정도다. 물론 과도한 과장법 내지는 뻥튀기가 되겠으나 암튼 그렇게 컸다. 이름도 예쁠 것같은 꽃들이 지천이다.

 

이렇게 주변 경치 보면서 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무리 가도 정상이 나오질 않는다. 한국같으면 요소 요소에 안내판이 있어서 등산로를 확인할 수 있을텐데 이넘의 동네에는 그런 친절함, 국물도 없다. 등산로 역시 잘 자란 수풀들로 인해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 하다. 후배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이 동네 사람들은 해변에서 낚시하고 요트타고 골프치고 달리기하고 뭐 이래 저래 운동이나 레크레이션 할 것이 많아서 굳이 산에 잘 가지 않는 듯하단다. 불쌍하다 북한산이여...

 

결정적으로 이 산에는 마실 물이 없었다. 이렇게 깊고 좋은 산에 물이 없다니??? 졸졸거리며 내려오는 개울은 몇 군데에서 발견했는데 이상하게 기름띠가 끼거나 물이 탁하거나 뻘겋거나 아무튼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산판 공사장에서 오염물질이 많이 흘러나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산세가 수려하고 좋은 반면에 마실만한 물이 없다는 것은 썩 탐탁치는 않은 일이다.

 

생각컨데 이 동네에 절간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한국 명산 요소요소에는 사찰이 들어서 있고, 여기 있는 스님들이 돌아다니면서 샘물도 찾아놓고 우물도 파놓고 한다. 나나이모에도 스님들이 있었다면 아마 벤슨산에 약수터가 수십개는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해인사에서 나나이모 지부 같은 거 하나 안 만들라나...

 

가이드는 여전히 길을 못찾아 헤메고 그나마 준비해온 음료는 작은 병에 주스 한 통과 맥주 세 캔. 이미 주스 한 통은 거의 다 마신 상황이고 행인은 술을 하지 않으니 맥주는 그림의 떡. 정말 간만에 요거 요 맥주 딱 한모금 마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의지로 음주의 욕구를 참았다. 아, 게다가 마침 담배도 가져오질 않았다는 거 아닌가... 결국 산행 하면서 흡연을 일체 하지 못했다는 ㅠㅠ

 

시간은 흐르고 햇볕은 따갑고...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랴. 고지가 여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하고 계속 등정. 막판까지 길을 못찾아 헤메다가 드디어 정상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원래 전체 등반 시간을 3시간 정도로 예상했었는데, 와 보니 올라오는 데만 5시간이 걸렸다...

 

정상에서는 나나이모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멋쥐다. 이 뱅쿠버 섬의 면적이 들은 바로는 남한의 3/4 가까이 된단다. 실제 면적 확인은 못해봤다. 어쨌든 그런데 이 섬 전체 인구가 70만 정도란다. 뱅쿠버 섬 두번째 대도시(?)라는 나나이모에 10만 정도 주민이 있단다. 좋겠다. 서울은 한 동에만 20만 30만이 바글거리는데...

 


벤슨산 정상에서 바라본 나나이모의 정경. 앞쪽으로 넓직하게 보이는 초원 비스무리한 것은 골프장이란다. 여기서 골프치려고 한국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온다는...

 

나나이모 시내 쪽을 등 뒤에 두고 산 반대편을 바라보면 놀랄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진 삼림이 보인다. 나무의 바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모자랄 정도의 거대한 숲. 행인이 항상 살고 싶어하던 나무의 천국. 그런 숲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저 감동하고 있을 밖에...

 



 

숲이 바다처럼 출렁거린다...

 

올라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려가는 것 역시 쑈의 연속이었다. 역시 우리의 가이드, 하산길에도 여지없이 길을 잘 못 들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많은 것을 보기도 했다. 이 산에도 군대 훈련장이 있었다. 어디나 깊은 산에는 군 관련 시설물이 있는 것이란 말이냐... 대피소 비스무리한 것도 있는데 사람 허리정도 높이로 통나무들을 엮어서 쉘터를 만들어 놓았다. 곰이 못들어오게 하려고 그랬던 거 같긴 한데...

 

길따라 내려오다 호수를 보게 되었다. 호수도 무척 크다. 백사장도 있고 물놀이하러 온 아이들도 있다. 물은 맑았고,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너무 잘 정비되어 있어서 조깅하는 사람들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대충 호수를 도는 산책로의 거리만 8Km정도 또는 그 이상일 듯 한데, 바로 주변에는 오토캠핑장을 비롯해서 행락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우리가 주차를 한 곳은 물론 산 입구 어디에도 가게나 노점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물론 사람도 많이 안 오니까 그렇겠지만 캠핑장 주변에도 그런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깨끗하게 유지관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암튼 우여곡절 끝에 산행을 마쳤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밤 11시가 다되어서였다. 아아,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반드시 다시 가보고픈 산이다. 벤슨산...

 

벤슨산 정상에서 후배 동생과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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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6 11:32 2006/07/0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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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위에서 행인의 모습이 젤 귀엽삼~! 글구, 뱅쿠버에 가서 살고픈맘이 모락모락... 정말 좋은구경 하고 와서 좋겠수다..부러부러부러비...

  2. 나도 배위 사진 원츄

  3. 나는 후배동생 사진!! ㅋㅋ

  4. 숲이 바다처럼 출렁여요?... 야 진짜 청바지차림으로 아마도 8시간 이상 등산하시느라 고생은 좀 되셨겠지만 재밌으셨겠습니다!!

  5. 하늘이 참 푸르군요 >_< 와~ 잼났겠어요 >_<

  6. 벤쿠버에서 빅토리아까지 페리 타고 갈 때 밖에 나가서 과자 던졌더니 온갖 새들이 달라들던 생각이 나네요. 아아, 부러워요. T.T

  7. 멒/ 꿰에~~엑

    batblue/ 아니 배트까정...

    azrael/ ㅎㅎㅎ

    리우스/ 저는 청색 반바지였슴돠... 숲이 어찌나 깊고 울창한지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면 햇볕이 들어오지 않더라구요.

    에밀리오/ 저 날은 그래도 유일하게 구름이 낀 날이었답니다. ㅎㅎ

    마님/ 앗, 왕림을 해주시다니. 요즘 많이 바쁘시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진짜 이름도 모르는 새들이 많더군요. 그 동네 사는 사람들 참 복받은 사람들이더라구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