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라크를 말하지 않았다
광복 59주년 815행사가 있었다. 행사는 국회의사당 앞에서도 있었고, 어느 대학 교정에서도 있었고, 나름대로 한 애국 하는 사람들도 지들끼리 모여서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대학교정에서 있었던 행사야 통일하자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었던 행사니까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다. 해가 가도 그 레퍼토리가 변함이 없으니까. 조국과 민족하고는 담을 쌓고 지내는 행인이다보니 애국자 노인네들 모여서 열심히 진행한 구국행사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다. 열심히 애국하시면서 말년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랄 뿐이다.
독립기념관에 마련된 단상에서 진행한 기념행사에서 우리의 호프, 우리의 맥주 노무현이 경축사를 했다. 참 길게 이야기했다. 정치인의 말이다보니 아무래도 싸움질할 "꺼리"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번의 쌈질 주제는 '과거청산'이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노무현의 발언은 표현의 외양만을 가지고 평가할 때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이 경제현안이 우선이니 어쩌니 하면서 이 문제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 참으로 볼썽사나운 몰골이다. 원래 이런 과거청산, 역사바로세우기 이런 거 한나라당이 해야할 일이다. 보수의 역할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 그런데, 노무현은 자신이 만들어 나가고 있는 "역사의 왜곡"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것 역시 역겨운 일이다.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극치다.
노무현의 경축사에는 과거청산, 정치현안, 남북관계, 경제문제 등 다양한 방면의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축사 말미에 "우리 함께 힘과 지혜를 모읍시다. 그 통합된 힘으로 우리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 나갑시다"라고 힘차게 포효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노무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모르고 이 말을 듣는다면 아마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라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히는 어떤 학생조직의 구호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묘하게도 이렇게 자국의 자주성을 이야기하는 노무현은 외국의 자주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우리의 자주성은 소중한 것이지만 저 중동 어느 나라의 자주성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가보다. 우리 안의 "왜곡된 역사"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이지만 아닌 밤중에 폭격을 맞고 머리통이 날아간 자식의 시체를 붙잡고 통곡하는 어느 사막사람들의 역사는 왜곡이 되어도 좋을 그런 것인가보다. 자국 국민들에게 "외세결정론적 사고"를 버려줄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미국에 의해 초토화가 되고 있는 남의 나라 국민들에게도 그러한 사고를 버려줬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이다.
외세에 의해 수탈당했던 치욕의 역사가 전환됨을 축하하는 광복절 행사. '일제'에 의해 강탈당했던 과거에 대해 분노하고, 다시는 외세에 '자주성'을 박탈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진행된 이 행사.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우리에게 반세기가 넘도록, 앞으로 몇 세기가 가도록 소중한 기억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 소중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의미가 결코 특정한 어느 집단에게만이 아니라 인류보편의 양심이 함께 기려야할 그런 내용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일 게다.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우리가 겪어야했던 그 참화가 다른 나라에 똑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 또한 선명할 것이다. 진짜로 우리의 해방이 이렇게 감격적인 것이었다면, 종속을 강요당하는 어느 열사의 땅에 사는 사람들 역시 그러한 해방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라.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한 일이 많았으면, 그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전쟁의 당사자가 늙어 죽었는데도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가? 불과 30년 밖에 되지 않은 베트남전쟁에 대해 대한민국은 베트남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진실된 사과를 하고 있는가? 혹시 아직도 자유주의를 수호하고 혈맹을 돕기 위해 그 땅에 갔었던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아주 짧은 시간이 흘러간 후 미래의 어느날 우리는 이라크의 "자주성"을 파괴한 것에 대해 또 무슨 변명을 하고 있을까? 국익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미국의 압력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노무현이 스스로 경축사를 통해 강조한 말이 있다.
"모든 것이 우리 하기에 달려있습니다"
바로 그거다.
모든 것이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필리핀을 보라. 인질을 살리기 위해 철군을 결정하자 미국은 필리핀을 향해 온갖 협박을 다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은 필리핀과의 선린우호관계는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긴밀한 우방국이라고 선언을 하고 말았다. 필리핀 인민들의 승리였다. 그들이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아무리 미국이 세계를 향해 협박질을 하더라도 "모든 것이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노무현은 결코 내년, 또 내후년의 815 경축사에서 이라크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할지도 모른다. 국익에 도움이 되었다는 뻥을 섞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왜곡"이며 이라크 국민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하수구를 빠져나가는 쥐새끼들처럼 소리소문 없이 이라크로 가서 지금도 뭐하고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는 우리 군대를 빨리 철수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서 815를 기념하고 과거청산을 이야기하고 자주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기다. 용서받을 수 없는 사기행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