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방의 추억

나일 먹는다는 증거일까...

 

행인이 끝까지 부르지 못하는 노래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정태춘 박은옥의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고 또하나는 민중가요 중에 "약수 뜨러 가는 길"이라는 노래다. 이 노래들은 이상하게 중간부분쯤 가면 감정이 북받쳐 부를 수가 없어지게 된다. 많이 울게 된다.

 

그 이유가 뭘까 갑자기 궁금해지다가 문득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들이 꽤 많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8살 정도까지의 기억이 왜 그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까? 이 기억은 계속 이어질까? 언젠간 또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그 단편들을 하나씩 정리해두려 한다. 그냥 넋두리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고, 그래서 더 간직해두고 싶은 기억들이 있는 거니까...

 

행인은 어디 가서 누가 "고향이 어디에요?"라고 물으면 경기도 양평군의 소위 "원적지"를 고향이라고 이야기한다.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거기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고향은 서울의 한 지역, 지금은 개발로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는 목동 이대부속병원 근처다. 60~70년대, 소위 뚝방 판자촌 중의 하나였던 그곳. 그곳은 그러나 행인의 인식 속에서 "고향"이라는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억은 뭐든지 다 아름다운 건가? 그 때가 새록새록 기억난다는 것은 그 아픔을 몰랐기 때문이거나 또는 아픔을 잊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행인은 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너무 어렸으니까.

 

뚝방 판자촌에서 행인은 "인생은 고(苦)"라는 사실을 이미 4살 때 알았다. 매일 아침 행인은 고뇌에 찬 어른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판자촌에는 입구 한 귀퉁이에 공동 화장실이 있었다. 남녀 구분이 없었던 그 화장실은 달랑 두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아침마다 그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 자리에 그렇게 자주 나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냄새나는 빈민촌 공동화장실 앞에 그것도 아침 나절에 행인은 자주 나갔더랬다. 어른들 따라 간 것인지 아니면 같이 살던 사촌형에게 끌려갔던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앞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서 어른들은 왜 저렇게 뭔가 고민을 많이 하고 있을까 궁금했던 거 같기도 하다.

 

공동 수도에 물을 받으러 가거나 동네에서 돌아다니거나 하면 막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하던 어른들이지만, 아침나절 공동화장실 앞에서는 아무도 행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굳은 인상을 하고 서로 인사도 제대로 함이 없이 묵묵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간혹 신문이나 책을 들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던 거 같은데, 뭐 그렇게 서 있는 사람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꼭 좀비같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어른은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어떤 어른들은 이빨을 꽉 문채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지금도 그 얼굴이 희미하게 기억나는 어떤 누나(공장다니던)는 평소에는 행인만 보면 좋아서 어쩔줄 몰랐던 사람이지만 아침나절 그 화장실 앞에서만은 가끔 애처로운 눈빛으로 행인을 쳐다볼 뿐 역시 인상을 쓰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가끔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화장실 문 앞에 바짝 붙어서서 안에다 대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무판자로 기워맞춘 화장실 벽에 손을 짚고 서서 고개를 숙인채 굳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그 사람들 손에 손에 신문지며 무슨 서류같은 거며 암튼 뭔가 휴지가 될만한 것들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고...

 

길어진 줄 뒤에서는 가끔 새치기도 일어났다. 동네분위기가 그런지라 다른 경우 같았으면 주먹다짐도 있을법 하건만 아침나절 공동화장실 앞에서는 서로 이빨만 옴팡지게 앙다문 채 발음도 이상하게 뒤로 가라거니 먼저 왔었다거니 하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물론 인상은 인생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나는 표정이었고.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인생의 고뇌를 집에서 해결하려는 사람도 하나 둘 생겨났다. 평소 걷던 걸음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으로 어기적 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을 보면서 행인은 오리를 연상했던 것 같기도 하다. 화장실 바로 근처에 선 어른들 중 어떤 분들은 계속해서 어흠 하는 헛기침을 하는 분도 있었고, 급기야 어떤 아줌마는 빨리 좀 나오라고 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빨만 물고 있었던 다른 어른들은 그 소리에 모두 동의하는 눈빛을 보낸 것으로 기억된다.

 

그 모습들을 매일같이 보면서 행인은 알아버렸던 것이다. "인생은 고(苦)"라는 것을. 모든 어른들은 고뇌하며 산다는 것을. 그러면서 궁금했다. 왜 어른들은 아침마다 저렇게 인상을 찌푸려야 하는 걸까. 어른들은 다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하루 속히 어른이 되고 싶었던 행인은 공동화장실에서의 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외할머니가 항상 "명경"이라고 부르시던 조그만 거울을 쳐다보며 어른들의 표정을 흉내내곤 했던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1/18 14:19 2007/01/18 14:19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722
    • Tracked from
    • At 2007/01/18 16:31

    행인님의 [뚝방의 추억] 에 관련된 글. 행인님이 안양천 뚝방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산오리도 그 동네서 오래 살았으니, 추억이 많다... 산오리네 행인이 살던 뚝방은 아니었고, 칼산이다.

  1. 음... 인생의 뭔가가 묻어 나는 듯 한;; 음... 저는 정치적 고향(?)이 수원이라고 말을 하고는 합니다만서도 크 ^^: 요새는 자주 못 뵈러 오고 있습니다 ^^; 총학생회 한답시고 블로그에 자주 오지도 못해서리 에효 >_< 인사드리고 갑니다~ 건강하시길!

  2. 그뚝방에서 몇년까지 사셨는지요? 혹시 안양천 구름다리는 건너다니지 않았는지요?ㅎㅎ

  3. 에밀리오/ 인생의 뭔가...는 아니구요. ㅎㅎ 구리구리한 어릴적 이야기죠. ^^

    산오리/ 옼... 산오리님이 다니시던 길목에 제가 살았을 줄이야... 뚝방골 사람들끼리 또 나눌 이야기가 많이 있겠는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