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방의 추억...

from 단순한 삶!!! 2007/01/18 16:31

행인님의 [뚝방의 추억] 에 관련된 글.

행인님이 안양천 뚝방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산오리도 그 동네서 오래 살았으니,

추억이 많다...

 

산오리네 집은 행인이 살던 뚝방은 아니었고, 칼산이다.

71년도 여름에 서울로 왔는데, 아버지가 영등포국민학교에 넣어줬다.

칼산에서 문래동의 영등포 국민학교까지 3형제가 걸어서 등하교를 했는데,

지금 걸어가라 해도 한시간은 더 걸릴 거리였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학교 가는데 한시간 반씩 걸어가고, 다시 집에 오는데 한시간 반 걷고...

아마도 산오리가 조금 잘 걷는다면 이때 단련한 것이 아닐라나 모르겠네..

 

 




논둑길을 지나서(이당시 논둑길이 지금 목동아파트 14단지 부근이다)

안양천 뚝방을 올라가서 뚝위로 한참을 걸어가서

행인네 집 근처의 안양천 아래에 구름다리가 하나 있었다.

안양천 물이야 장마철 빼고 나면 항상 어른들이라면 걸어서도 건널 정도의

깊이와 폭이었으니 20~30미터쯤 되는 다리였던 거 같다.

양쪽에 쇠줄을 걸고, 그 아래에는 빈 드럼통을 몇게 받쳐 놓고,

다리바닥은 나무 판자를 어설프게 올려 놓은 모양새다.

그러니 건너 갈때 다리 위에서 출렁거리며 장난치고 놀기 좋은 다리였다.

 

그 다리는 물론 정부에서 만들어준 다리는 아니었나 보다.

다리 입구에 조그만 움막(요즘 이동식  화장실 만한)을 지어 놓고,

다리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돈을 받고 있었다.

한번 건너는데 5원이었던가?...

(그다음해 중학생이 되었을때 시내버스 교통비가 10원인가 15원이었으니까 결코 싼편은 아니었다.)

아마 한달치로 끊으면 몇십원 됐던거 같은데, 얼마였는지 기억이 없다.

이 다리는 안양천 뚝방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문래동이나 도림동의 공장으로 넘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었기에 아침 출근시간이면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름 방학때나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가다 보면,

어라, 다리가 없어졌다. 큰 비 와서 다리를 쓸고 내려가 버린거다.

그러면 또 그 다리 다시 만들어질때까지 오목교까지 걸어내려 가거나,

고척동까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가기도....

 

겨울방학 시작할때 쯤이나 2월 봄방학 전에는

군데군데 조금씩 물이 고인 곳이 있었는데,

얼음 아래 붕어들이 놀고 있었다는....

그때까지는 안양천이 그나마 물고기 정도는 살정도는 되었었나 보다.

산오리는 안양천에서 목욕해 보지는 않았는데, 그 전 몇해까지는 안양천에서 여름에

수영을 하고 놀고 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 긴 안양천 뚝방을 따라서 서너줄의 판자집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칼산에 올라가서 보면 그건 예술이었다.

서울 중심가에서 쫓아내니까 쫓겨 와서 집단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었거나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변두리로 모여들어 만들어진 주거지였을텐데,

그래도 줄을 맞춰서 지었으니까 위에서 보면 멋있어 보였다.

학교 갔다 오다가 심심하면 뚝방위를 걷는것이 아니라,

뚝방 아래의 동네 좁은길을 걸어서 왔다.

문앞에 내놓은 연탄재를 차기도 하고,  동네 개 똥구멍을 차기도 하고...

그 동네 지나다니면서 행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화장실도 가끔은 애용하고...

 

74년인지 75년인지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안난다.

엄청 큰 물난리가 났는데, 안양천이 넘칠 지경에 이르렀고, 지금 목동아파트가 들어선

논바닥은 완전히 잠겨서 커다란 바다가 되었다.

안양천 뚝방으로 물구경을 갔는데, 뚝방아래 사람들이 온통 가재도구를 꺼내들고선

뚝 위로 피난을 올라 오고 있었다.

뚝방아래 집들 가운데 낮은 쪽의 집들은 절반이 물에 잠겼다.

그 동네에 살던 우리 친척 한사람이 애를 낳았는데, 물이 집에 잠겼으니

갖난애기를 싸들고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다.

뭔지 모르고 물구경에다, 집에는 손님들이 왔으니 그저 좋아 했었다는...

당시에 물이 안양천을 넘기 일보 직전까지 갔는데,

소문에 의하면, 문래동 쪽의 뚝에 대포를 설치했다는 거였다.

문래동쪽으로 둑이 터지면 공장들의 피해가 막심할테니까

아예 목동과 신정동 쪽의 뚝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직접 보지 못했기에 사실인지 소문인지는 모르겟다.

물 내리고 다시 안양천 건너 문래동으로 갔더니, 그동네도 어른 가슴만큼은 물이 잠겼는데,

당시에 수세식 변소 없었으니까 온통 똥물로 물이 잠겼던 선을 선명하게 그려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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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6:31 2007/01/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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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인 2007/01/18 16:4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아... 그 다릴 건너다니셨군요... ㅎㅎ
    나중에 아마 그 자리에 오목교보다 훨씬 낮은 인도교가 하나 만들어졌었죠. 물론 장마져서 물 불면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고요.

    그 물난리 저도 기억합니다. 그 때 동생을 들쳐 업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디 갈 곳이 없어서 시골로 물피난을 갔었죠. 그동안 함께 사시던 외할머니는 가재도구 챙기고 말리고 이리 저리 피난다니시느라 생 고생을 하셨다고 하구요.

    그 다리... 구멍뚫린 철판을 드럼통에 얹어놨던 그 다리 건너기 무서워서 엉엉 울었던 일도 있었는데... 산오리님이 그 다릴 건너다니셨다니 ㅎㅎ 물난리난 사건은 나중에 또 올릴려고 했는데 이걸 먼저 보네요. 참 기분이... ㅎㅎ

  2. 행인 2007/01/18 16:4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아... 생각해보니까 그 인도교는 출렁다리(라고 불렀던 듯 해요) 자리가 아니라 오목교에서 현재의 도림천 역 방향으로 쭉 올라와서 있던 거군요. 암튼 산오리님 덕분에 더 기억이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ㅎㅎㅎ

  3. 산오리 2007/01/18 16:5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마저요, 나중에 오목교 지나다니다 보니까 콘크리트 다리 하나 만들어졌더군요. 콘크리트 다리는 지나다닐 일이 없었다는..ㅎ

  4. 과객 2011/10/01 00:4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 뒤 콘크리트 다리가 오원짜리 다리였습니다 오원 내고 건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