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탓이오...

천주교 기도문 중에 요런 구절이 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한 때, 견진까지 받았던 행인, 제일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 바로 요거다. 모든 일이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누구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만사가 내 안일함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자각할 때, 비로소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가 눈에 띄게 된다. 하긴 이 구절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시국미사를 하면서 스스로 가슴을 쳤던 것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의 어지러움이 "내 탓"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린 그들은 거리로 나섰다.

 

한데, 아무리 봐도 노무현은 언제나 "니 탓이오, 니 탓이오, 니 큰 탓이로소이다"를 외치며 산다. 집권초반부터 언론때문에 모든 일이 망쳐졌다는 신념을 피력하면서 매사를 조중동 탓으로 돌리던 그는, 집권말기까지 정치파탄의 근본을 한나라당에서 찾는다. 물론 노무현이 언론의 본질적인 속성, 청와대의 표현을 빌어보자면 "하이에나"같은 속성을 처음부터 몰랐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한나라당이 그 연원에서부터 건전한 정치세력이 될 수 없는 유전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리도 없다. 그런데, 왜 주구장창 마치 몰랐다는 듯이, 그럴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는 듯이 계속 이런 식의 발언을 할까?

 

실상 노무현은 조중동과 각을 세우면서, 한나라당을 씹어먹을 것처럼 설레발이치면서 집권 4년 반을 내내 그들과 손잡을 궁리만 하고 살아왔다. 그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칼부림을 할 것마냥 흥분했던 것은 오로지 말로만 그랬을 뿐이다. 집권기간 동안 노무현은 실질적으로 조중동이 원하는 일들을 해왔고,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할 꿈을 꾸어왔다. 이라크파병, 미군기지이전, 한미 FTA, 국가보안법 등 개혁입법, 기타 등등 수많은 노무현의 "치적"들을 보라. 과연 노무현 후보 당시의 지지자들과 진보개혁세력의 입맛에 맞게 진행되었는지, 아니면 수구 잔당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요구에 맞게 진행되었는지.

 

소위 "개혁"의 실패로 귀결된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게 된 책임이 온전히 조중동과 한나라당에 있는 것이었나? 국가보안법을 저지경으로 만든 원인 중의 하나는 지가 소속된 열우당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종횡무진 말바꾸기에 정신이 없었던 노무현 자신의 입방정이었다. 실체가 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 "국익"을 앞세웠던 이라크 파병은 조중동의 환호와 한나라당의 엄호속에 이루어졌다. 평택으로 미군기지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계엄령도 내리지 않은 채 군 병력을 동원했다. 조중동은 미군기지 이전반대운동을 국가전복세력의 폭동으로 규정했고 한나라당은 이에 동조했다. 한미 FTA를 초지일관 폭력적으로 밀어부친 자 역시 노무현이다. 조중동은 유래 없는 논조로 한미 FTA 타결을 격찬했고, 한나라당은 노무현을 자신들의 대통령인양 추켜세웠다.

 

4월 임시국회가 폐회되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볼모로 국민연금법, 사법개혁입법, 임대주택법, 4대보험 징수 통합 등 당면문제처리를 방해했다고 맹비난했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다. 따져보자.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가지고 그토록 난리를 치는 것은 원천적으로 의문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학을 사유재산으로 치부하는 것이 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게다가 한나라당의 강력한 지지세력 중 하나가 바로 사학재벌들이다. 그렇다면 그 대척점에서 열우당과 노무현은 어떠했나?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운동 이후 한나라당이 목숨을 걸었던 것이 사학법 개정 반대였다. 그 와중에 여대야소라는 절호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민주노동당의 힘을 빌려 그나마 거의 만신창이가 되다시피한 사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통과시킨 이후에 다시 사학법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열우당과 한나라당은 사학법을 전혀 성격이 다른 로스쿨법과 딜하려 했다. 거기서부터 문제는 꼬이기 시작한 거다. 왜 전혀 성격이 다른 두 법률안을 딜하려 했나? 왜 노무현은 사학법 재개정에 대해 열우당에게 유연한 자세를  충고했나?

 

정권 막바지 개혁입법과제 추진이 좌초되면서 "이미 수조원의 손실이 발생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손실이 계속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음을 노무현은 토로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원인을 한나라당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한 처사다. 노무현은 퇴임 후에도 조중동과 한나라당을 정권 최대의 적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의 비망록에는 조중동과 한나라당에 대한 온갖 독설과 저주가 채워질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실정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 터이니까. "내 탓이오"라고 할만큼 노무현은 용기가 없다. 겉으로 보이는 입을 앙다문 노무현의 강인한 모습은 내면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연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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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1 14:22 2007/05/0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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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데이 집회에 나가지 않게 된 2007년이다... 속이 씨어~~언 하면서도 뭔가 허전하다...

  2. 저도 안나갔어요. 아니다. 못나간건가.

  3. 허허.. 스티커 뿌리러 나오셨어야죠. 미리 상기시키지 못한 내탓인가? :)

  4. 그게 넘 궁금해요... 왜 주둥이로는 수구보수꼴통을 욕하면서 실제 정책은 그들의 것을 그대로 못해서 안달인지...또 지들의 요구대로 다 들어주는 노무현을 두고 왜 조중동은 맨날 까대는지...그게 이해가 안되요..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하는 놈들끼리 서로 욕해대니까 그걸 보고 있는 우리같은 무지랭이는 이게 뭔짓인지 헷갈려서.

  5. 어제는.. '강단 위에 9~10살 여자애들 올려놓고 머리애 꽃 꽂고 노래틀고 춤추게' 하는 등등의 일들은 없었습니다. 만약 그럴경우 '집에 돌아와야할까, 옆 사람을 설득시킬까'고민했는데.... 아마 죄다 창원으로 몰려가서 그랬던거 같습니다..

  6. 난 집회는 갔는데...중간에 술마시러 가서 집회 내용은 하나도 모른다는 ㅠ.ㅠ

  7. 지각생/ 지각생 탓은 아니구요. 갑자기 심드렁해졌어요.

    산오리/ 저도 요새 그게 궁금합니다. 도대체 노무현 머리 속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힘자랑 하는데 맛들인 건 아닌가... 그렇게 결론이 가고는 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심하네요. 쩝...

    pilory/ 아마 창원에서 했을 겁니다. 독자후보내겠다고 선포하면서 우리민족끼리 통일하자고 축배들면서 애들 무대 위에 올려놓고 꽃잔치 했겠죠... 아후, 답답하네염... ㅜㅜ

    azrael/ 오... 탁월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