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 4.30, 새벽 - 5.01

기형도에게 반했던 적이 있다. 그에게서 넘지 못할 벽을 느낀 소년이 있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그 한마디에 몇날 며칠을 새웠다. 나는 어쩌면 저렇게 명료한 시구 하나를 남길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더랬다.

 

그렇게 기형도에 몰입하던 소년에게, '노동의 새벽'은 충격이었다. 핏국물로 얼룩진 그 시들은 그에게 부모의 이야기였고, 자신의 미래였고, 슬픔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무엇은 없었다.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소년에게 "입속의 검은 잎"은 감당하기 어려운 난해한 부호의 연속이었고, "노동의 새벽"은 희망의 서곡이 아닌 절망의 언어였다. 그리하여 소년은 슬픈 '안개'도 잊고 싶었고, 전쟁같은 밤일조차 잊고 싶었다. 차라리,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봄"을 찾아 헤맨 건 그래서였을 거야. 소년은 누군지도 모를 미지의 여인을 "봄"이라 불렀고, "봄"에게 편지를 쓰면서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다. 편지를 보낼 주소도 없었고, "봄"이라는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도 없었다. 시 나부랭이처럼 씌여졌던 글들, 주절주절 거리며 써내려갔던 편지들, 모두 어느 쓰레기통을 거쳐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밤을 지새 쓴 글들은 지금 다 사라졌다.

 

어쩌면 소년은 수도 없이 많은 순간 "봄"을 만났었는지도 모르겠다. 때론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혼자만의 "봄"을 간직하다가 혼자 아파하며 "봄"을 보낸 적도 여러번이었나 보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가는 동안 기형도의 시들은 메말라버린 감수성을 더 이상 적시지 못하게 되었고, 박노해의 시들은 아직도 여전히 끔찍한 현실이다.

 

세월이 흐르기도 전에 기형도는 죽었고, 세월의 뒤끝에 박노해는 박기평이 되었다. 소년은 자랐고, 이름도 모를 행인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 "봄"을 만나진 못했다. "봄"인줄 알았으나 "봄"이 아니었던 적도 있었다. 해마다 봄은 왔다가 가고, 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올해의 봄도 그렇게 끝나가겠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철딱서니 없던 문학소년의 허황된 꿈도 사라진 지금, 아직도 "봄"을 그리는 건 아직 행인이 유치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봄"을 벌써 놓아주었어야 하는데, 여태 "봄"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계절은 여전히 겨울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5/01 00:35 2007/05/01 00:35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796
    • Tracked from
    • At 2007/05/01 07:50
    Subject: 봄편지

    행인님의 [밤 - 4.30, 새벽 - 5.01] 에 관련된 글. 며칠 전에 집에 간 김에 부모님 집, 내 방에 꽂혀있는 몇개의 시집을 싸들고 왔다. 정말 달랑 몇개 밖에 없더라-_-; 그나마 내가 반했다고 자랑하던 오규원 시집 중 한 권은 도망 갔고; 기형도 전집은 두꺼워서...들고 오는 것을 포기했고... 아아, 각설.

    • Tracked from
    • At 2007/05/01 08:00
    Subject:

    행인님의 [밤 - 4.30, 새벽 - 5.01] 에 관련된 글. 오규원의 '시'라는 제목의 시도 마저 보냅니다_ 시 오규원 1 나는 미국문학사를 읽은 후 지금까지 에밀리 딕킨슨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그녀의 신장 머리칼의 길이 눈의 크기 그런 것은 하나도 모른다.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1. 나의 완벽한 '시'는 신파로 몰더니만...넘 잔인하군! 자신의 감수성에 대해선 이렇게 절절 할 수 있다니...미워! 지금은 행인이 되어 있을 그 소년이. 하지만, 행인이 되기전의 그 소년은 너무나 가슴 아프게 나를 울리고 있다는...쩝~

    지금까지의 포스트중, 가장 나의 심금을 울린 포스트라는거...알까??(모르면 말고...ㅎ)

  2. 멒/ 신파로 몬 게 아니라 넘 분위기가 무거운듯 해서 농담 한 번 한 거유. ㅋㅋ 그나저나 이 글 제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할 걸 그랬나 싶어요. ㅎㅎ

  3. 그러니까, 봄은 매년 왔는데 씨앗을 심거나 가꾸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이런이런. 게으르긴.

  4. 술을 마시는 저녁마다 박노해가 옳지 않겠느냐고 말을 했지만, 시를 다 쓴 아침이면 기형도가 나와있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5. 춘래불사춘이라 >_< (글 쓴거 제목 이걸로 해버릴까 쿨럭;)

  6. 거한/ 빙고~! 그랴서 이번엔 놓치지 않을라구요. ㅋ

    박노인/ 그랬군요...

    에밀리오/ ㅎㅎㅎ

  7. 봄이는 .... 얼마전에 티비 드라마에 나오던데.... --

  8. 낯선/ 호오... 드라마에 나왔단 말인가...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