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5월 24일이 기대되는 이유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원사이드한 경기였다.

 

주전들의 부상, 원정경기, 폭우, 혼이 나갈 듯한 홈팀 관중들의 함성과 야유. 이런 이유들이 맨유가 챔스리그 4강 2차전에서 AC 밀란에게 3 : 0 완패를 당한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분명 이런 요인들이 영향을 끼치긴 했다고 할지라도 EPL에 열광하는 팬들의 입장에서 맨유의 이번 경기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이라.

 

호나우두의 화려한 드리블은 비에 젖은 축구공에 적용되지 못했다. 긱스의 고군분투는 빗속에 잠겼다. 스콜스의 크로스는 예리함을 보여주지 못했고, 케릭과 오셔의 패스는 번번히 차단당했다. 비디치는 대인마크에 실패했고 판데사르는 옆구리를 빠져들어가는 공을 향해 빈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루니는 경기 내내 겨우 몇 차례만 공을 잡아봤을 뿐이다.

 

반면, AC 밀란은 올드 트래포드에서 보여줬던 투지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역시 카카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과 그가 찬 공의 궤적은 정확하게 일치했다. 면도칼 같은 패스와 슛. 이번 챔스리그 경기 동안 카카는 90% 이상의 유효슛팅과 그 중 30%가 넘는 슛 성공률을 과시했다. 무시무시한 넘이다. ㄷㄷㄷ

 

네델란드 출신 전사 시드로프의 두 번째 슛은 카카가 넣은 첫 골의 코스와 똑같이 들어갔고, 판데사르를 두 번째 똑같은 포즈로 눕혔다. 후반 중반에 인쟈기와 교체 투입된 질라르디노의 마지막 골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골대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3명의 슛은 모두 말 그대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골들이 승부를 갈랐다.

 

물론 그렇게 골을 성공시킨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 세골은 단지 이 세명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쟈기는 부지런하게 전방을 쓸고 다니며 맨유 수비진을 휘저었다. 네스타와 얀쿨로프스키는 진공청소기같은 마력을 과시했다. 골키퍼 디다의 철벽방어는 그가 거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이 경기에서 행인의 눈을 끈 사람은 당연히 가투소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이 돌덩어리같은 몸매의 목짧은 사나이는 호나우두와 긱스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특히 호나우두는 가투소에 막혀 제대로 드리블조차 해보질 못했고, 후반 중반부터 맨유는 사이드라인 앞뒤를 오가며 드로인만 계속해야 했다.

 

가투소. 성난황소 내지 싸움소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철벽미드필더다. 네델란드의 싸움닭 다비즈와 더불어 가장 전투적으로 축구를 하는 가투소는 그래서 "하얀 다비즈"라는 또 하나의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박지성을 "모기(mosquito)"로 빗대 말했던 것으로 한국 팬들에게도 유명한 가투소. 2006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우승의 주역 중 하나였던 그는 마라도나를 연상케 하는 빵빵한 갑빠를 내밀며 상대팀 선수들에게 강한 대쉬를 하는 모습으로 많은 팬들의 인상에 남아 있다.

 

이번 경기에서 가투소의 투지를 새삼 확인했던 것은 그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투소는 작년 11월 5일, 세리에 A 리그 경기 중 심각한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될 위기에 처했었다. 상대선수와 격돌하여 무릎 부상을 당한데다가 인대마저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다행히 한달여만에 부상에서 회복해 다시 시즌 복귀를 했었는데, 지난 챔스 4강 1차전에서 맨유와 경기 중에 에브라와 충돌하면서 부상을 당해 교체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팀이 3 : 2 로 역전패 당하는 아픔을 곱씹어야 했다.

 

큰 부상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가투소가 2차전에 투입될지 여부는 상당히 불투명했다. 그러나 가투소는 경기에 출장했고, 사이드라인을 따라 다니면서 호나우두를 봉쇄하는가 하면 중원을 훑고 다니면서 스콜스마저 괴롭혔다. 경기 중간중간마다 관중들을 향해 더 큰 함성을 유도했고, 교체되어 나가면서 소속팀 감독의 뺨을 양 손으로 툭툭 쳐주는 시건방짐(?)까지 과시했다.

 

가투소의 전방위적 질주와 함께 AC 밀란의 수비는 말 그대로 빗장수비였고, 맨유 선수들은 어디를 어떻게 뚫어야할지 몰라 허둥댔다. 쏟아지는 장대비와 관중들의 함성이 맨유선수들을 얼어붙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경기는 완벽하게 AC 밀란이 장악했던 것이다. 긱스의 말대로, 맨유는 볼 점유율을 높이지 못했고, 그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전날 벌어졌던 챌시와 리버풀의 경기는 연장까지 가는 120분의 혈투 끝에 승부차기까지 들어가 결국 리버풀이 승리했다. 드록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찬스를 살리지 못한 챌시는 4강에서 만족해야 했고, 시즌을 포기한 대신 챔스리그를 위해 전력을 다졌던 리버풀은 이제 5월 24일, 우승컵을 놓고 AC 밀란과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EPL 팀들만으로 챔스리그 결승전이 벌어지는 맥빠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행인의 입장에서는 진짜 기대되는 이벤트가 된 것이다. 카카의 킬패스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리버풀의 그 파도치는 듯한 경기운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가투소의 타오르는 투지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5월 24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참고로 가투소는 행인이 하고 싶은 경기스타일을 대신 보여주는 선수다. 그래서 더 정이 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가투소, 액면이 왜 이리 늙어보이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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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4 06:07 2007/05/04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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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앙... 카카얘기밖에 눈에 안 들어옴-_-;;; 가투소라굽쇼? 우리 카카에게 짐이 되나 안 되나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지 ㅋㅋ
    ;;; 농담이고, 마라도나같은 땅땅한 몸매라니 경기도 그런 식인가 자못 궁금하네요. 호호


    아아 우리 카카ㅠㅠㅠ
    ;;

  2. 뎡야핑/ 오호호호홋~! 역시 카카 팬들이 많군요. AC밀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일단 카카를 생각하는데요, 제가 볼 때는 카카만큼이나 즐거움을 주는 선수 중 하나가 가투소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아요. 몸매와 경기방식이 아주 어울리는 그런 선수죠. 카카야 뭐 하하... 그 킬패스 하나만으로도 이름값을 하는 선순데, 잘생기기까지 했다뉘... 뷁...

  3. 가투소, 말걸기는 걔만 보면 탄성 연발. "저 자식 참... 허허... 멋져..."
    그리고 행인 말대로 진짜 액면가 높더군.

  4. 말걸기/ 오호~! 가투소의 경기모습을 보면서 멋지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면 말걸기의 관전수준도 상당한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