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행인님의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에 관련된 글.

 

임순례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꼭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걍 의무감 같은 거였다. "그 경기"를 봤던 사람으로써, 그리고 다시 없는 희열과 감동을 맛봤던 사람으로써 반드시 봐줘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와이키키브라더스"를 보고서 영화란 게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함으로써 행인으로 하여금 문화적 감수성을 약간 뜨이게 해준 임순례 감독에 대한 고마움에서가 아니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보여주었던 그들의 몸짓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벨기에라는 상대팀과 승패를 놓고 다투는 경쟁으로서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니라, 공을 잡고 몸을 흔들고 슛을 꽂아 넣고 상대팀을 마크하는 그 행위 자체가 뛰어난 예술이었기에 기억에 남은 경기다. 그리고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은 그 경기가 왜 예술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확인시켜주는 근거였다. 역사에 남는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그 배경이 범상치 않은 것이니까.

 

우생순이 가지는 힘 역시 그거다. 프랑스와 벨기에 선수들을 상대로 펼친 경기장면. 헐리우드식 스포츠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 장면들은 좀 낯설기조차 하다. 박진감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중계방송을 보는 것보다도 못하다. 그러나 그것이 별로 신경쓰이지는 않는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배경으로 하는 우주 전쟁스토리, 미국 드라마 "베틀스타 갤럭티카"에서 생뚱맞게 '60트럭'이 등장해도 그것이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에서 경기장면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살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과 주변을 상대로 싸워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까. 여자로, 엄마로, 사회인으로, 그리고 국가대표로 그들은 열악한 환경과 냉정한 사회와 편견과 마초근성과 그리고 애들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벨기에와 가진 아테네 올림픽 핸드볼 결승전은 그 싸움들에서 그들이 견뎌나가는 과정 중에 하나의 소품이었을 뿐이니까. 우생순은 적어도 그런 의미의 영화로 행인에게 다가왔다.

 

그러다보니 번번히 "가문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혜경(김정은)의 눈 똥그랗게 뜨는 연기가 분위기의 맥을 끊어도, 푼수떼기같은 오수희(조은지)의 연기가 가끔은 오바성이 짙게 보여도, 영화 전체에서 일종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위치에 있어야 할 안승필(엄태웅)의 역할이 별다른 특색 없이 구색맞추기 정도에서 끝나도 전체 극의 흐름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화에서 좀 놀랐던 것은 "복길이"의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었던 김지영의 연기였다. 전형적인 뽀글머리 파마의 식당 아줌마, 선수생활을 하면서 복용한 호르몬제로 인해 임신을 할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여인, 언제나 중심에서 배제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선수생활, 이런 것들을 모두 극복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는 역할이 정란인데, 김지영은 이 부분들을 어색하지 않게 잘 표현했다.

 

주인공이라고 해야하나? 하긴 뭐 이 영화는 선수들 모두가 주인공이긴 한데, 한미숙(문소리)은 남편과 아이, 직장과 돈 때문에 정신적 공황을 겪을만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팀 안에서는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한다. 미숙은 혜경에게는 극복의 대상이었고, 승필에게는 귀찮은 '아줌마'였다. 사는 게 치사하고 쪽팔리다는 미숙의 넋두리는 막판에 끝까지 할 거라는 의지로 바뀐다. 가장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등장인물이다. 문소리는 참 그 역에 어울리는 연기를 잘 한다.

 

임순례는 이 영화에서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고싶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든 연극이든 한 테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으로 쑤셔 넣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 우생순은 그런 무거운 이야기들을 복합적으로 잘 섞어놓는 미덕을 보여준다. 비정규직의 문제, 이혼녀의 문제, 마초근성, 보육의 문제, 악덕채무의 문제 등등. 게다가 이 영화는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면서도 천박한 쇼비니즘을 동원하지 않는다. 선수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아닌, 그들을 바라보는 자들이 조국과 민족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기장을 찾아온 붉은 악마풍의 응원단, "우리 선수들"을 되뇌이는 중계방송. 그러나 경기장 안에서 뛰는 선수들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멀다. 살기 위해, 그저 핸드볼이 좋아서, 존경하던 선배선수를 넘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뛰었다.

 

의무감도 의무감이지만 아테네 여자핸드볼 결승전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기에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많았다. 이걸 절묘하게 알아채고 심야영화관으로 행인의 손을 이끈 울 앤님에게 감사와 경의를! 덕분에 벌써 4년이 되어가던 어느날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올해는 꼭 앤님 손 잡고 핸드볼 경기 구경을 가보고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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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0 22:59 2008/01/20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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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8/08/10 01:13

    행인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글. 세계최강 러시아는 엄청난 골키퍼를 가지고 있었다. 전반 중반이 지나가고 후반전이 한참 진행될 때까지 "우생순"들은 흔들렸다. 러시아 골키퍼(시도르바?)는 신들린 듯 골을 막아냈고 "우생순"들은 잦은 패스미스로 곤혹스러워했다. 양 사이드에서 송곳처럼 파고들며 날리는 슛도 그닥 많지 않았다. 우선희의 빈자리가 너무나 커보였다. 전반종료 16 :13

  1. 꼭 '손 잡고' 구경 가시길.

  2. 비대위 일이 빨리 잘 마무리되야지 '손 잡고' 구경 가실 시간이 생길 텐데 말입니다.^^(핸드볼 경기는 주로 겨울에 하죠)

  3. 이 영화를 볼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행인님 글을 읽은 이상 꼭 봐야할 것 같습니다. ^^

    그건 그렇고, 글 내용과는 관계없이 광고(?)를 하나 덧붙입니다. 혹시나 진보넷에서 활동하신 임동이라는 분을 알고 계시는 분이 있으면, 늦었지만 제가 어줍잖은 글(http://yagoo.tistory.com/1742)에서 그 분의 글을 인용했다는 것을 좀 알려주십시오. 블로그가 폐쇄된 상태라서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한 상황입니다. 이상 글과는 상관 없는 리플을 달게 된 점에 대해서는 행인님의 하해와 같은 이해심을 발휘해주시길 바랍니다. ^^;;;

  4. 꼭 '손 잡고' 구경 가시길.2
    --> 행인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되는건가요? ㅎㅎ

  5. 근데, 저도 이거 볼까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또 이명박이 이 영화 봤다고 해서 -_-

  6. 말걸기/ ㅇㅇ

    삐딱선/ 그러게요... ㅠㅠ

    손윤/ 뭐 꼭 안 보셔도 되용 ^^ 아, 글구 제 블로그에서 뭐 필요하신 거 있음 언제든지 이용하세요. 하해와 같은 이해심 그딴 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온 동네 사랑방 노릇해보는 것이 제 블로그의 바램이니까요. ㅎㅎ

    re/ 헤...^^;;;

    ScanPlease/ 맹박이야 뭐 뭔들 못보겠어용^^ 예전에 서편제를 DJ가 보고 나서 완전 떴는데, 나중에 보니 그런 극예술 영화가 뭣때문에 떴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지금도 뭐 그렇습니다만. 맹박이 신경쓰지 마시고 함 보세요. 맹박이가 찔끔거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얻을 것이 있으니까요. ㅎㅎ

  7. 영화를 볼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좌파의 무기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는.....
    주위의 국민(시민)들을 짜증나게 하는 위압적인 깃발과 주먹질이 아닌.

    당에도 문예위라는게 있습니다.
    집회때 무대를 장식할 노래패 섭외하는 것이 주목적인 것 같은...
    자주통일투쟁의 도구로만 문화를 사고하는 집단이죠

    당의 활동방식이 집회 시위만이 아닌, 개개인의 상상에 기반한 다양한 문화적 토대위에서 이루어 질때 진보정당은 국민과 소통하게 될겁니다.

    영화이야긴 행인님이 다하셨고.... 임순례감독과 배우 문소리는 너무 멋진 감독과 배우죠. 암튼,
    오락프로에 영화홍보하러 출연해서 간혹 멋쩍어 하는 모습의 문소리가 생각나네요. 주구장창 귀여운 걸루 우려먹던 김정은의 모습도 새로웠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