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과 행인의 차이

행인님의 [손석춘, 이제 그만 하자] 에 관련된 글.

 

 

또다시 격앙된 손석춘의 목소리를 보다가 그의 생각이 왜 행인과는 맞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다.


일단 손석춘은 '종북주의'라는 단어를 '잘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종북주의 실체 이전의 문제를 따지는 데 실체를 추궁한다"고 이 단어를 쓰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그런데 손석춘이 이야기하는 "실체 이전의 문제"는 과연 뭘까? 아주 단순하게도 손석춘이 따지고자 하는 그 문제는 이 용어를 수구세력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손석춘은 "종북주의"가 진짜 있냐 없냐 이전에 이러한 용어를  수구세력이 쓰고 있으니 사용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행인의 생각은 다르다. "실체 이전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실체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체가 있는데, 그 실체를 논하는 말이 단지 우리의 적들이 사용하는 말이라고 해서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은 언필칭 말로 먹고 사는 언론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우리 말에서 "동무"라는 말과 "인민"이라는 말을 매장시켰다. 물론 드러나는 언어정책을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시대 정권은 북한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적대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북한에서 많이 사용하는 "인민"이니 "동무"니 하는 말들을 사장시켰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입장에서, 남한 민중들이 "인민"이니 "동무"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실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인민)이 있느냐, 아니면 또래들끼리 자연스럽게 우정을 매개로 교분을 가지는 관계(동무)가 있느냐 이전의 문제였을까?

 

현존하는 실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전제를 깔지 않은 채, 적대적 대립관계를 가지고 있는 특정집단이 그러한 실체를 특정한 용어로 규정하여 호칭한다는 것만을 문제로 그러한 용어를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손석춘은 너무나 어려운 표현으로 "실체 이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왜그러실까? 딱딱하고 어려운 한자말 대신 정겹고 쉬운 우리말 쓰기를 그토록 고집하는 분께서.

 

게다가 손석춘은 북미 핵문제나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냉각될지 모르는 남북관계를 거론하면서 이것이 민족문제가 아니면 뭐냐고 항변한다. 손석춘과 행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차이가 여기서 발견된다. 행인에게 북미핵문제나 남북관계의 경색은 "민족문제"라기 보다는 "생존문제"가 된다. 항상 가늘고 길게 살고자 노력하는 행인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핵이나 북한의 핵이나 모두 두려운 존재일 뿐이다. 또한 이명박이 뻘짓을 해서 남북간에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건 민족이고 나발이고 간에 행인이 목적하는 가늘고 긴 삶에 대한 충분한 위협일 뿐이다.

 

손석춘은 계속해서 미국을 들먹거린다. 사실 이 대목에서 평소 행인이 자랑하는 욕설신공을 펼치고 싶다만 꾹 참고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거 당신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왠만큼 사회문제 걱정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해주고 싶다. 다만, "종북주의"를 운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미국의 문제는 "겨레의 문제" 혹은 "민족의 문제" 이전에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좀 알아줬으면 싶다.

 

그리고 적어도 진보신문이라 자임하는 한겨레에서 한자리 해먹었던 분이면 최소한 조선일보식 마타도어는 하시면 안 된다. 손석춘이 비난하는 그 사람들이 언제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에 열정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나? 당내에서 최기영, 이정훈이 자신들의 행위를 통일운동이라 주장하는데 그거 정말 통일운동이었다고 생각하나? 생존의 문제가 걸린 핵폭탄을 두고 자위권 발동이라 주장하는 세력이 평화세력인가? 이런 사람들이 "진보"요 "좌파"라고 생각하나?

 

훈수를 두려면 제대로 두기 바란다. 지금 민주노동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홍은 손석춘이 주장하는 것처럼 "통일운동에 재"뿌리는 것이 아니다. 통일운동이라는 명목 뒤에 자신들의 부당함을 은닉하려는 일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당원의 정보를 외부세력에게 넘기고 당 내에서 특정정파의 사조직을 결성해 당 강령을 위반하면서도, 그것을 통일운동이요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잘못을 덮어버리는 것은 운동가의 참 모습이 아니다. 그것때문에 이 난리가 벌어졌다. 이 난리가 제대로 정리되려면 국가보안법은 국가보안법 대로 대처하고 당 안에서 벌인 프락션에 대해선 그거 대로 대처해야 한다. 이걸 두고 자꾸 통일운동에 재뿌리는 것이라고 설레발이 치는 손석춘은 정론직필이라는 언론인의 직분을 스스로 버리고 있는 중이다.

 

덧 : 이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종북주의"라는 용어는 적절치 못하다. 적어도 합리적 우파로서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북을 선린교류의 대상으로는 볼지라도 북이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을 "종북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한 열렬한 그리움으로 충성맹세를 작성하여 껴안고 다니는 사람들의 경우, 이들은 어떤 "주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볼 수 없다. 이들에겐 "주체교신자"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무슨 "주의"자라는 표현은 매우 아까운 표현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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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9 22:44 2008/01/2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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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8/01/30 10:08

    부제 : 창조적인 연예 블로기즘을 위하여 이제 좀 잠잠한 것 같아서, 좀 담담하게 회고(까지는 아닐지라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짧게 씁니다. 0. 지난 1월 25일에 나훈아 기자회견이 있었죠. 이게 좀 욕먹을 생각같습니다만, 나훈아도 그렇고, 연예 찌라시즘 전파하는 각종 스포츠신문과 포털도 그렇고, 좀 '짜고치는 고스톱'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나훈아는 나훈아대로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제대로 된 홍보용 퍼포먼스 한판 때렸고, 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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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t 2008/02/17 21:51
    Subject: 비판

    쉬운 일은 비판이라기 보다는 신경질, 투정, 비난이다.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된' 비판은 비록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기존 의미관계, 권력관계에 창조적인 균열을 가져오기 때문에 생산적이다.0. 비판만 있고 대안이 없잖나?? 라고 볼멘 소리하는 일이 오히려 굉장히 쉽다. 그건 기존의 권력관계와 의미관계에 조력하는 일이 되기 쉽고, 좀더 부정적인 측면을 (우려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기득권과 기존 권위에 복...

  1. '종북주의' 표현 반대! '김일성(김정일) 추종 노선', '김일성주의'가 더 좋아. '주체교신자'는 '주체교회'와 함께 써야 함.

    그리고 통일운동(이를 '선린교류' 차원으로 본다면 할 말 없다만)은 이제 오류덩어리이므로 재 뿌려도 됨.

  2. 음... 오늘도 후배랑 이 문제를 놓고 술자리에서 한 판 붙고 오는 길입니다만서도 ^^ 역시나 오늘도 행인님께서 글 쓰셨길래... 적어도 잘은 모르지만, 후배가 주장하기를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라는 이야기와 "지금이 굉장히 중요할 때인데... 싸울 때가 아닌 것 같다" 라는 주장에 반대하고 왔었습니다만서도 여튼 그렇습니다 으하하하^^

    내공 부족을 절실히 느낀 달까요? ^^;

    P.S. 종북주의라는 말이 듣기 거슬리기는 한가봐요. 그 사람들 말이지요; 종북주의라는 말 말고 듣는 사람들도 듣기 거북하지 않고, 수용할 만한 거 없으려나요? 제너럴 K 팬클럽 같은? 음... 이런건 아니려나요? ^^;

  3. 말걸기/ 그거 가지고 연구논문 한 편 발표하심이...

    에밀리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만, 저는 진보가 지들 입으로 뱉어논 말도 책임지지 못해서 망했다고 생각해요. 세상 모든 이치가 분열과 융합의 반복인데, 자칭 진보하겠다는 사람들이 '분열'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인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를 두려워한다면 앞으로 나가기 어려울 거에요.

    아무튼 지금은 최대한 자기가 가진 밑천을 다 드러내고 서로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듯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