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즐겨라, 허락된 순간까지

같이 일하는 어떤 분이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면서, 특히 소위 'e-스포츠'라고 하는 게임산업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역설한 적이 있다. 행인, 그 의중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 채 정부가 특정산업에 대한 몰아주기식 지원을 하는 것은 대단히 불합리한 것이라고 맞장구를 쳐줬다.

 

그런데, 이분께서는 단지 행인이 이야기하는 정부지원의 획일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게임 그 자체에 대해 경멸과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주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순간 행인과 이분의 대화는 전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갔다. 이분은 'e-스포츠'라는 것 자체가 죄악이며 없어져야할 현상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이었고, 행인은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이분이 우려하시는 것은 이런 거다. 한참 책을 읽고 수양을 쌓고 할 일도 많은 청소년들이 또는 한참 일할 나이의 청장년들이 게임에 빠져 폐인이 되고, 삶 자체를 황폐하게 만들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거나 가족 등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더 나가서는 게임 속의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현상까지 벌어지는데 이건 사회적인 병폐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게임개발업체를 진흥 육성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며, 일체 지원을 중단해야한다는 것이 이분 주장의 골자였다.

 

게임산업이 가지고 있는 외부적 효과에 대해서 이분은 부정적인 측면만을 너무 깊게 보고 있다고 판단한 행인, 그리하여 게임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에니메이션, 음악, 촬영기술, 컴퓨터기술, 기타 수많은 예술적 요소와 산업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설명하는 한편, 게임으로 인해 나타나는 병폐는 어떠한 다른 일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임을 구구하게 설명했으나 그닥 설득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암튼 그 이후로 이분하고 게임에 대한 이야기는 예배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듯이 암묵적으로 피해나갈 주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온라인게임만이 이 분이 이야기하는 엄청나고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게임으로 인해 나타나는 병폐는 스포츠에서고 도박에서고 마약에서고, 심지어는 운동(movement)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이 살아가는 어느 곳 어떤 일이든지 그런 위험성은 존재한다. 어차피 인류가 가장 많이 죽는 장소는 바로 자신의 집구석이 아닌가? 그걸 피하기 위해 가출을 해야하나??

 

이분이 이야기하는 병폐가 게임 이외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분야가 있다면 열 손가락 안에 축구가 낄 것이 분명하다. 단순히 11명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여 둥근 공을 이쪽 저쪽으로 차는 것이 전부인 이 경기가 얼마나 많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던가?

 

1964년 페루 수도 리마에서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경기. 경기종료 직전 주심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골이 번복되자 누가 먼자라고 할 것도 없이 관중들이 경기장 안으로 오물을 투척하며 격렬히 항의한다. 놀란 경찰이 관중석으로 가스총을 발사하고 공포를 쏘았다. 관중들은 놀라서 한꺼번에 경기장을 빠져나가려 했고, 경찰은 관중들을 출구쪽으로 몰고 갔다. 이 와중에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85년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스타디움에서는 잉글랜드의 리버풀과 이탈리아의 유벤투스가 유러피언컵 결승전 경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경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잉글랜드에서 날아온 훌리건들이 이탈리아 관중들을 향해 돌격했다. 훌리건을 피해 달아나던 이탈리아 팬들은 자기들끼리 뭉치고 깔려 압사하거나 훌리건들에 의해 들려 경기장 아래로 집어 던져졌다. 이 사태로 인해 39명의 이탈리아 팬들이 살해되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이 있던 날, 소련의 한 버스기사는 빨리 운행을 마치고 결승전을 보고싶다는 일념으로 경고등을 무시한 채 철로 건널목으로 돌진했다. 결국 달려오던 열차와 정면충돌해 31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방글라데시의 한 동네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결승전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시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전이 되고 말았다. 축구에 몰입하고 있던 시청자들은 격분했고 그대로 몰려가 발전소를 습격했다.

 

1994년 월드컵 후승후보로까지 꼽히던 콜롬비아는 16강에도 오르지 못한 채 귀국길을 서둘러야 했다. 그들 가운데는 미국전에서 자책골을 만들며 1대2 패배의 원흉이 되어버린 에스코바르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에스코바르는 괴한에 의해 총살당했다.

 

1989년 4월 리버풀 대 노팅엄 포레스트의 영국 FA컵 준 결승전이 벌어졌던 힐스보로 경기장이 과다한 관중때문에 방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95명이 죽고 2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이보다 앞서 1971년, 스코틀랜드 안에서 거의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셀틱 대 레인저스 경기가 열린 아이브록스에서는 경기장의 강철기둥이 무너지면서 관중 66명이 압사당하고 14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1985년에는 브래드포드 대 링컨 시티의 경기 와중에 스탠드 바닥에 붙은 불로 인해 56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쳤다.

 

19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프랑스에 지자 브라질 축구대표들과는 전혀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는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 여러 곳에서 자기 머리를 권총으로 박살내버린 사람들이 숱하게 나왔다. 지금도 가끔 빅매치가 이루어지는 잉글랜드 경기장 어느 곳에서 경기결과와 관계 없이 상대팀의 서포터들을 으슥한 곳에서 살해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한다.

 

축구에 목을 매달고 사는 아들의 머리 위로 권총을 발사한 아버지의 이야기나, 경기장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사건 축에도 끼지 못한다. 누가 경기장의 철근 밑에서 압사를 당하고 싶어 경기장을 찾겠는가? 또는 누가 TV로 경기를 보다가 응원하는 팀이 다른 가족들과 주먹다짐을 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런 사건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국가차원에서 축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비이성적인 일도 부지기수다.

 

2차대전 당시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나치는 우크라이나의 클럽팀이었던 디나모 데 키에프 선수들을 지역 스타디움으로 불러내어 히틀러 대표팀과 경기를 가지게 했다. 나치는 디나모 데 키에프 선수들에게 경기에서 이길 경우 모두 죽일 것이라는 경고를 했다. 져주고자 시작한 경기였으나 경기가 계속될 수록 키에프 선수들은 부끄럽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축구의 승리라는 원초적인 본능을 되살리고 말았다. 결국 디나모 데 키에프 선수들은 히틀러 대표팀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나치는 약속을 지켰다. 선수들은 모두 지역에서 가장 높은 벼랑 위에서 유니폼을 입은 채 사형당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진출 티켓을 놓고 북중미 최종예선 A조 경기를 가졌다. 온두라스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온두라스의 승리. 엘살바도르에서 열린 2차전에서 엘살바도르는 3대0의 스코어로 승리한다. 그러나 편파판정에 항의하던 온두라스 관중들이 폭행을 당한 채 쫓겨났다. 이 소식에 흥분한 온두라스 인들은 자국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들의 집을 습격하고 방화 약탈하면서 폭행을 가했다.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하고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에 대해 수입금지조치를 내린다. 결국 양국은 국교를 단절했고,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진 3차전의 결과와 무관하게 7월 13일 양국은 선전포고를 한 후 5일 간 2천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가면서 전쟁을 하고 말았다.

물론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전쟁은 축구때문만은 아니다. 축구의 결과는 개스로 가득찬 저장고에 던져진 성냥불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들은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경제적인 문제로 싸워왔다. 엘살바도르 이민들로 인해 온두라스의 일자리가 없어졌다는 주장과 온두라스인들의 차별로 엘살바도르 사람들이 뼈빠지게 일만하고 오히려 굶주린다거나 하는 일들로 서로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 대해 에두아르노 갈레아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메리카 학교'에서 생산된 두 나라 독재 정부는 상호 증오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중략) 비옥한 토지를 지닌 부자 사나이들은 이 전쟁에서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반면, 신발도 제대로 못 신은 불쌍한 양국 주민들은 애국적인 열정을 가지고 서로간에 살상을 자행하며 복수를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축구라기 보다는 그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이윤을 얻거나 권력을 유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생하는 거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문제지 축구가 문제는 아닌 것인가? 그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문제다. 어쨌던 중요한 것은 축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 간에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그 반대편에서 그것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게임이나 축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적어도 게임에서만큼은 인종차별이나 민족감정이나 하는 것들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축구가 게임보다 더 위험하면 위험했지 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그것을 즐기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이다. 그 즐거움을 특정한 목적에 이용하려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이고.

 

그래서 결론은 그거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언제나 그 즐거움을 허락받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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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8 11:33 2006/04/2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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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지막 문장은
    요사이 몇년 제 생활신조이기도 해요 ㅋ

  2. 고렇숨돠~~~ 근데 저게 그렇게 맘대로 안 되는 것이 또 문제더라구요... 즐길 수 있을 때인데 즐기질 못하는 거, 이거 병이에요 병...

  3. 쩝 .. 사실 진보계열 - 이라고 뭉뚱그리기에는 그렇지만 - 에서 스포츠를 바라보는 시선은 만화책을 바라보는 권장도서파들과 다를 바가 없죵 ..

  4. 헐... 기억나네요. 그 옛날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이 있던 후, 평론가들이 말했지요 >_< 총질하는 게임 때문이었다고 말이죠... orz...

  5. 꼴통차기/ 행인의 경우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만화다"라고 할 정도인데요... ㅎㅎ 스포츠, 만화, 게임 등등 역시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민중들의 삶에 엉겨 발전되어온 것이라는 점보다는 아편과 같이 민중의 머리를 녹슬게 하는 것이라는 비판지점을 더 크게 보는 분들도 있죠. 저처럼 전자를 더 크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구요.

    에밀리오/ 그것도 코메디죠. 지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무엇인가에 모든 죄과를 덤태기 씌울 수밖에 없는 자들이 만들어낸 궁극의 도피처가 바로 게임이었던 거죠. 행인은 솔직히 김일병 보다 그 당시 전문가입네 하고 이처럼 엉뚱한 소리를 했던 사람들이 더 무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