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

모름직이 지금 헌법에 대한 개정을 이야기하려면 '원 포인트 개헌' 운운하면서 4년 중임제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대립되는 이데올로기 사이의 투쟁을 이야기해야 한다. 예컨대 이런 거다.

 

1. 기본권 보장에 관한 조항들 일체를 재점검 해야한다.

- "국민"에게 보장된 기본권을 "누구에게나" 보장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 "열거되지 아니한 권리" 중 열거할 수 있는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어야 한다.

- 자유권적 기본권에 충실한 만큼 사회권적 기본권에 대한 보다 폭넓고 강력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

 

2. 경제정의부분을 더욱 강력히 재정비 해야한다.

- 경제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견제와 제한을 강화해야 한다.

-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경제적 보장책을 확보해야 한다.

 

3. 평화체제에 대한 의지를 높여야 한다.

- 분쟁의 소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영토조항에 대한 정비가 필요하다.

- 군축에 대한 명확한 대안을 가져야 한다.

 

4. 통치구조를 보다 민주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 책임 없는 대통령제를 책임지는 대통령제로 만들어야 한다.

- 주권자의 의지를 반영할 수 있는 민중발안제 민중소환제 민중투표제를 설치해야 한다.

- 3권 분립을 보다 분명하게 할 수 있도록 의회와 법원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노무현은 오로지 '대통령 4년 중임제'만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겠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대선과 총선을 같이 하도록 하겠다는 취지에서 개헌을 올해 안에 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이러한 구상이 결국 '모 아니면 도'식의 정치판을 만들겠다는 구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지금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노무현의 개헌론에 의해 사라진 정치적 투쟁의 장(場, field)이다.

 

헌법이 그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임은 더 이상 설명이 불필요하다.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자에게 있어 헌법은 저항해야할 지배집단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헌법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근대 시민혁명 이후 설계된 각국의 헌법은, 비록 그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체제선언'이라고 할지라도 사회 제 계급계층의 투쟁의 산물로서 마련된 최소한의 합의가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은 계급의 이해와는 달리 보편적인 사회의 가치를 전면에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헌법의 해석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입장에 따른 과도한 해석론적 이해는 자칫 '아전인수'로 전락할 수 있지만, 헌법현실에 대한 사회의 충분한 공감대 형성은 새로 몇 개 규정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적절하게 사회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민"에게 한정되어 있는 법문상의 기본권보장 규정은 비록 형태가 그러할지라도 그 근본적인 이념이 "국민"만이 아닌 법효력이 미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해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개헌론이 가지는 결정적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헌법의 개정은 사회구성원 간의 치열한 투쟁과 소통의 결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특히 이념적 측면에서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헌법의 개정이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의 '원 포인트 개헌론'은 한 순간에 이데올로기적 대립현상을 완전히 무력화시켜버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적 개헌론의 제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없다. 집권에 가장 근접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요동을 치면서 정치사안으로 문제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개헌론은 오직 4년 중임제가 정권획득과 유지에 어느정도 득실이 있겠는가 하는 논의로 전락해버렸다.

 

또한 현 시기는 지난 4년간 참여정부의 실적을 평가받는 기간이다. 그 평가의 구체적이고 완결적인 절차가 바로 대선이다. 12월 대선을 1년 앞두고 있는 이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대중들로 하여금 차기 대선을 위한 기본적 입장을 정리하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이 중요한 시기에 개헌론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평가의 논의를 무력화시키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항간에 유행하는 말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노무현의 이번 개헌론은 바로 이 우스개 소리를 "이게 다 헌법 때문이다"라는 전환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져야할 정치적 책임을 헌법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여기에 헌법해석의 중요성이나 이념적 대립의 중요성이나 현 정부의 실정이나 하는 이야기들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실 이런 방식의 개헌, 즉 정권유지와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론은 우리 헌정사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부터 시작해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전두환은 정권의 안정적 승계를 목표로 '호헌'을 주장했다는 것이 좀 다른 것이긴 했다만. 정권 연장을 위해 3선 개헌을 하고, 영구집권 개헌을 했던 것이 이승만, 박정희라면 전두환은 민중이 요구하는 개헌을 외면한채 이승만, 박정희와 똑같은 목적에서 '호헌'을 주장했다.

 

노무현의 이번 개헌주장 역시 본질적인 맥락에서 이와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의 정권연장을 위해서보다는 집권말기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겠다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과, 자기정권의 연장보다는 한나라당이라는 반대세력의 집권기도를 흔들어보겠다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 정도다. 그리고 이 와중에 개헌론에서 진정으로 검토되어야할 사항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렸다.

 

섯다판에 돈 걸듯 하는 노무현의 정치적 승부. 평택 미군기지 이전과 한미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밀어부치기. 이러다 안 되면 읍소... "저 대통령 그만 두겠습니다. 도저히 한나라당 때문에, 조선일보 때문에, 헌법 때문에 이 짓 못해먹겠습니다..." 이건가??

 

노무현 정권이 개헌론을 통해 정국돌파를 할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했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그 꼼수를 내놓았는데, 내놓는 시기는 가치중립적 표현으로 "매우 절묘했다". 이 기회를 운동진영이 이용해서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개헌정국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지금은 비록 비관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민중의 삶과는 아랑곳 없이 게임으로 정치판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될 것이고...

 

덧 : 웹서핑을 하다보니 시기 적절한 카툰을 하나 발견!

정국카메라 - 정윤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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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0 13:10 2007/01/10 1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