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에 관한 간단한 메모

행인님의 [개헌론] 에 관련된 글.

1.

지난 9차에 걸친 개헌은 모두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의 정권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마치 통치구조, 그것도 통치구조의 극히 일부인 대통령의 선출과 권한부분만을 개정하면 나머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듯이 논의들이 이어졌다.

 

헌법의 기본권조항이나 경제조항은 통치구조를 축으로 하는 헌법개정론에서 일종의 들러리 또는 구색맞추기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2.

현재 진행되는 개헌론은 아예 '원 포인트 개헌'이라는 노무현의 구상이 드러내 보여주듯 역시 대통령의 권력구조를 어떻게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단계적 개헌론'이 일정하게 일리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헌법개정은 적어도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결과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이러한 부분이 탈각된 채 권력집단의 이해에 따라 이루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런 전제로 볼 때, 노무현식 개헌론은 논란의 대상이 되질 않아야 정상이다. 오히려 왜 지금 이토록 급하게 마치 사활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논란이 되어야 하는지가 의문시되어야 정상이다.

 

3.

도리어 진정 급하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은 헌법현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헌법적 관점에서 우리의 이념을 실현해오고 있었는가이다. 즉, 헌법해석투쟁에 우리는 얼마나 적극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제 아무리 독재정권이라고 할지라도 헌법에는 기본적인 인권의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적어도 그 내용은 소위 '보편적 인권'이라는 세계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검증된 내용들이다.

 

독재정권이 권력안정을 위해 조작한 헌법은 항상 그래서 헌법 내부의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유신헌법을 보라. 같은 헌법조문 안에서 도저히 같이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들이 가득하다. 기본권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기본권 위에 대통령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모순을.

 

4.

그러함에도 헌법현실에 근거한 헌법차원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맞붙은 양측은 모두 헌법의 수호를 주장의 전면에 내걸었다. 헌법의 조문은 결코 양측에 공통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헌법적 투쟁은 주장의 전면에 '호헌'이니 '개헌'이니 하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이념적인 동시에 헌법해석 투쟁이 된다. 기본권을 지키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측이 있는 반면 형식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선전하면서 형식에 따른 기본권의 침해를 당연한 것처럼 주장하는 측이 있다.

 

이들은 싸울 수밖에 없고, 서로에 대한 적대적 관계를 자신의 승리를 통해 해소하려 한다. 공권력이 동원되는 반대편에서는 손에 짱돌을 쥔 사람들이 서게 된다.

 

5.

87년 체제논의가 87년 헌법체제논의로 이상스레 전환되는 과정에서 헌법해석투쟁은 소멸했다. 인권단체들을 비롯한 사회의 비판세력이 그동안 주장해왔던 헌법해석투쟁에 해당하는 논의는 작은 목소리로 취급된다.

 

반대로 사회의 모든 문제가 사실은 대통령 5년 단임제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만이 온 사방에 회오리친다.

 

대통령의 임기가 몇 년이냐에 따라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면 헌법은 복잡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의 선출방법과 대통령의 임기만 적시해 놓으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의 형태를 헌법이라고 하면 된다.

 

6.

'원 포인트 개헌'과 맞물려 노무현이 주장하는 대선 총선의 동시실시는 실제 노무현이 이야기하는 중간평가의 중요성과 배치되는 사고다. 중간평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오히려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맞추면서 국회의원선거를 그 중간에 맞추는 것이 더 적절하다.

 

대선과 총선의 시기를 맞출 경우 소위 말하는 '연미복효과(coattail effect)'가 극대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선의 향방에 따라 총선의 향방이 결정되는...

 

미국식 양당체제를 구축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군소정당에 의한 다양한 정치참여는 물건너 간다. 무소속 출마해서 국회의원 당선된다는 것은 로또 당첨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 된다.

 

7.

우리는 헌법해석투쟁조차 제대로 진행해보질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헌법을 개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침소봉대하는 판이 벌어졌다.

 

거기에 조건부 반대를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당 바깥에서는 물론 당 내의 일각에서조차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라는 "실미도"의 설경구 대사가 터져 나온다. 이들에게 묻고 싶다.

 

대통령임기가 아니라 영토조항(제3조)과 평화통일조항(제4조)부터 단계적으로 개헌하자고 하면 안 될까? 국가보안법이 잔존해 있을 수 있는 근거조항이 되는 이 부분을 먼저 개헌하고 그 결과물로서 시원하게 국가보안법부터 해결하면 안 될까?

 

대통령임기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거조항을 명확하게 헌법에 규정하는 것부터 단계적으로 개헌하면 안 될까? 그렇게 해서 말도 되지 않는 집시법을 시원하게 개정할 수 있도록 하면 안 될까?

 

대통령임기가 아니라 주택에 대한 국가적 책임 및 주거권(점유권)에 대한 국가적 보장을 헌법에 규정하는 것부터 단계적으로 개헌하자고 하면 안 될까? 그리하여 임대도 되지 않아 텅 빈 수많은 빈 방에, 집없고 서러운 사람들을 들어가 살도록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사실 헌법을 개정해야만 주장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지금 헌법구조 안에서도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이야기다. 잘 되면 지금 헌법을 고치지 않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다. 싸우다 싸우다 결국 안 되면 이런 것을 집어넣자고 개헌투쟁을 해야 한다.

 

대통령 임기는? 4년 중임으로 하면 레임덕이 사라지나? 그럴 것 같으면 미국 대통령들은 왜 허구한 날 임기말만 되면 레임덕 이야기가 나오나? 더구나 걔네들은 중임제도 아니고 연임제인데...

 

물론 5년 단임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5년 단임제라는 제도보다는 4년 중임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더 많다는 것 역시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마치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그러한 주의주장에 말려들어가는 것은, 이건 인정할 수 없다.

 

8.

오마이뉴스에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렸다. 과연 전면적으로 헌법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에 도움이 되겠냐고. 그러니 노무현식 개헌론에 일단 힘을 실어주자고.

 

민주노동당이 내놓는 진보적인 개헌의 방향은 전부 한나라당에 의해 막힐 것이고, 한국사회의 힘의 균형이 이미 보수정치세력에게 기운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장은 씨도 먹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 헌법의 좋은 부분마저도 빼앗길 수 있다는 주장.

 

보고 웃었다. 개헌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장에 대해 그처럼 고려하는 자가 개헌정국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을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 모순. 현실론으로 포장된 그 글은 사실 필자 스스로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내 스스로 모자란 줄 잘 알기에 사람들에게 이런 말 안하려 노력하는데, 그 글을 썼던 사람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해줘도 별로 거리낌이 없을 듯 하다. "공부나 좀 더하세요"

 

9.

어디다 쓸 메몬지는 모르겠다만 간단하게 할라고 했는데 잡설만 늘어놨다. 그냥 요즘 소회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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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 20:22 2007/01/15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