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연대체라...

참세상에 뜬 "상설연대체 건설, 지금도 늦었는데"라는 기사를 보다가 문득 든 생각. 지난 9월에 있었던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던 '77인 선언'에 대해 이분이 뭐 해명한 것이 있었던가? 평택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면과는 달리 투쟁의 전선을 희석시키는데 일조했던 사람들 중 바로 저 기사의 주인공이 있었다. 소위 '진보진영상설연대체 건설을 위한 기획단'의 기획단장이 되신 박석운 민중연대 집행위원장이 바로 그사람이다.

 

앞으로 참세상의 연재기사가 이어질 것이고 거기서 누군가가 대차게 이 "상설연대체"라는 것이 민중운동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들 조직이라는 점을 설명할 것이므로 행인이 깊이있게 왈가왈부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깊이있게 이야기할 만큼 이야기할 거리도 없고.

 

한 때 당게시판과 여타 진보(라고 자칭하는)사이트에 왕왕 올라오던 문구가 있다.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사자성어다. 강택민 중국 주석이 클린턴과 회담을 하는 도중 대미관계에 임하는 중국의 원칙, 즉 상호존중, 평등상대(平等相待), 구동존이 3개 원칙 중 하나가 이 구동존이다. 원래는 주은래가 중국외교의 제1원칙으로 내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2차에 걸친 국공합작을 만들어낸 주은래라면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된다.

 

이 단어가 당게시판과 여타 사이트에서 왈가왈부된 데에는 나름대로 맥락이 있다. 바로 "상설연대체" 건설을 합리화하기 위한 상설연대체 찬성론자들의 이론적 배경이 구동존이였던 거다. 다시 말해 모든 제 운동단위들이 각자의 자잘한 차이는 접어 두고 진보운동이라는 큰 틀에서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이 간단명료한 사자성어로 표현하면서 "상설연대체" 건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견 그럴싸한 이 사자성어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문득문득 머리속을 헤집는 구호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통 큰 단결"이라는, 과거 어느 운동권 정파조직이 양념처럼 갖다가 써먹던 그 구호였다. 이 조직은 스스로 문건 하나 쌈빡하게 만들어낼 능력도 없이 80년대 이래 조직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자료들을 꺼내들고 시시때때로 연도와 이름만 바꿔 이용하면서도 대단한 쪽수를 자랑하던 불가사의한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통 큰 단결"은 언제나 자신들보다 쪽수가 딸리는 소수정파들을 향해 외치던 구호였다. 입장 자체가 첨예하게 다르고 운동의 방식조차 다르지만 오직 정권에 저항한다는 동질성 하나만으로 함께 뭉치자는 그들의 주장은 외견만으로 볼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입장을 한 발 물리거나 다른 집단의 이해를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취한 적이 없음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통 큰 단결"은 니들 거 다 버리고 일단 우리쪽에 붙으라는 이야기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와바리 왕창 차지한 전국구가 군소 양아치들에게 숙이고 들어오라고 협박하는 것과 다름 없는 짓을 "통 큰 단결"이라고 겉치장만 요란하게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

 

구동존이라는 사자성어를 볼 때마다 "통 큰 단결"이라는 구호가 생각난 이유는 구동존이를 외치는 사람들의 하는 짓이 "통 큰 단결"이라는 구호를 외치던 어떤 집단과 판에 박은듯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는 짓만 닮은 줄 알았더니 사람들 역시 그넘이 그넘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판박이같은 소리만 줄창 할 수밖에.

 

그런데 이 사람들, 말을 하려면 골라서 했어야 하는데 사자성어를 제대로 고른 것이 아니다. 혹은 그 진정한 뜻을 알면서도 지들 입맛에 맞게 각색해서 사용한 것이다. 전자라면 무식한 넘이라고 비웃음을 살 일이고 후자라면 아전인수라고 비판을 받을 일이다.

 

원래 '구동존이'는 '구대동존소이(求大同存小異)'의 준말이다. 즉, 크게 같은 것을 찾고 사소한 차이는 놓아 둔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뒤쪽의 '존소이'다. 왜 '존(尊)'자를 쓰지 않고 '존(存)'자를 썼을까? 서로간의 작은 차이를 존중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작은 차이를 그냥 둔다는 것은 언제든지 그 차이를 빌미로 "대동(大同)"했던 관계를 틀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구동존이 또는 구대동존소이라는 거창한 한자조어 안에 사실은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암기가 숨어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 이 "통 큰 단결" 이야기 종종했던 사람들이 그 말만 믿고 통 크게 단결했던 사람들의 뒤통수에 비수를 꽂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학창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는 제쳐두고 사회관계 속에서 겪었던 것만 따져도 큰 거 몇 건은 쉽게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97년, 02년 대선, 04년 총선, 지난 '77인 선언'까지...

 

"집행위원장"하기도 바쁜 와중에 "기획단장"까지 맡게 된 박석운 역시 "대동소이한 상황에서 통 크게 같이 가자"고 강조까지 했단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러다가 또 97년, 2002년 짝이 나는 거 아닐까. 게다가 이 조직의 강제력있는 의사결정과 효율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최고의결기구"를 두고 그 성원으로 "민주노총의 의결기구인 중집 및 중앙위 구성원, 전농의 의결기구에 준하는 구성원, 당, 전빈련 등 제조직들의 의결기구에 준하는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결정"하도록 하고싶단다.

 

이 정도 구상을 하고 있다면 아예 정당을 하나 차리지 무슨 "연대체"를 구상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구동존이'하고 '통 큰 단결' 할 수 있는 사람끼리 모여 민족통일당을 만들던 민족자주당을 만들던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다. 민중연대랍시고 온갖 단체 다 끌어모아놓고 정작 집행위원장이라는 자는 투쟁열기에 찬 물을 끼얹는 짓이나 해놓고 민중연대만으로는 안 된다는 설레발이를 치는 모습, 솔직히 말하면 엿같다.

 

"새로운 주객관적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하는 것에 대한 창조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는 또 다른 운동권 보수주의"를 경계하시는 박석운 기획단장. 사실 "운동권 보수주의"라고 비판받아야할 부분은 선거시기만 되면 "반 한나라당 연합"이니 "상설연대체"니 하는 식으로 온갖 단체들 다 끌어모아놓고보자는 식의 사업추진하는 그 빌어먹을 관성이다. 지금 누가 누굴 "운동권 보수주의"라고 비아냥 거리고 있나?

 

박석운보다 더 웃기는 사람들은 당내에서 "상설연대체" 가자고 동 띄우고 난리버거지를 쳤던 정책위의장 이하 여러 닭들이다. 이 닭들은 도대체 당이 수렴할 수 있는 운동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진보진영의 역량을 어떻게 당으로 수렴할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 전망도 제시하지 않고 상설연대체를 건설하자고 난리를 친 바 있다. 그럴 걸 왜 당에서 끼적거리고 앉아있나? 전위조직 하나 만들어서 지하혁명운동을 해야지.

 

이 닭덜이 지령 한 번 내리자 당게와 온 동네 사이트마다 돌아다니면서 구동존이 어쩌구 했던 인간들 보면서 느낀 거는 "야, 진짜 얘네들 쪽수는 많구나"하는 것이었다. 언뜻 연상이 되는 장면은 다름 아니라 AI 방역반이 몰아닥친 어느 양계장에서 바글바글 거리고 있는 닭들이었다. 그 불쌍한 닭들, 졸지에 살처분 되었는데, 이 동네에서 꼬꼬댁 거리고 있는 닭덜은 AI 바이러스마저 피해간다.

 

참세상 인터뷰 하면서 상당한 이빨을 까느라 고생한 박석운 기획단장. 민중연대 집행위원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에 대해 먼저 사과부터 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 속 뻔히 들여다보이는 구동존이, 통 큰 단결 그만 되풀이했으면 싶다. 이젠 정말 징글징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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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02:02 2006/12/21 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