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설~!

2006 월드컵 조별리그전 제2차전에서 한국은 프랑스와 맞붙는다. 앙리, 지단을 앞세운 막강화력, 초대형 블록버스터인 마케렐레, 말루다의 종횡무진한 중원장악, 갈라스, 실베스트레가 버티고 있는 수비. 전력상으로만 보더라도 객관적으로 한국은 프랑스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야할 판이었다.

 

게다가 아드복 특유의 이해하지 못할 선수진 운영과 단조롭기 그지없는 전술. 공의 방향과 선수들의 행동은 프랑스 선수들에게 족족 걸리게 되고 프랑스의 공격은 초반부터 강력했다. 전반 10분이 채 되지 않아 윌토르가 넘겨준 공을 받은 앙리는 가볍게 선취득점을 올린다.

 

상황의 반전은 그다지 빨리 오지 않았다. 후반 15분이 지나면서 프랑스 선수들의 집중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한국선수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공을 잡는 시간을 늘려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후반 종료 10분을 남겨두고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 진영 왼쪽을 깊숙히 파고들던 설기현이 프랑스 왼쪽 윙백인 아비달을 제치고 반대편으로 길게 크로스, 껑충 뛰어오른 조재진이 헤딩으로 공을 받아 문전쪽으로 밀어 넣었고, 달려들던 박지성이 발끝으로 가볍게 넘긴 공은 바르테즈와 갈라스를 지나면서 골대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결과. 조금만 더 밀어부쳤으면 어땠을까 할 정도로 이후 한국팀의 컨디션은 전반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고, 경기는 더더욱 재밌어졌다. 결과는 1 : 1 무승부.

 

이 경기 중 프랑스 선수들을 보면서 행인이 느낀 것. 첫째, 프랑스 수비진영의 압박감. 미드필더인 마케렐레가 "멀티"라는 표현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를 보여주었으리만큼 적극적인 수비장악을 보여주었고, 갈라스나 실베스트레 등 수비수들은 철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둘째, 조금 낯선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선수의 활약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다.

 

그 선수는 레옹에서 뛰고 있는 "에리크 아비달"이었다. 왼쪽측면을 전담했던 아비달은 행동반경이 남달리 넓어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특히 아비달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상대 공격수들의 볼 컨트롤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아비달이다...

 

월드컵 기간 중 6경기 총 570분 출장의 시간 동안 아비달은 공식 기록 상 32번의 태클을 걸고 14개의 파울을 기록하면서 상대 공격수들을 막아냈다. 아비달의 수비력은 전 경기 내내 단 한명의 선수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국가대표 공격수들이 자신을 제치고 자신의 후미로 돌아 센터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격수의 입장에서 수비수를 제치고 뒤로 돌아들어가 공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기량의 반도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비수 정면에서만 공을 다루게 되면 이미 상대하고 있는 수비수가 자신의 행동상황을 다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상대편에게 읽히는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아비달은 그런 점에서 수비가 할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월드컵 스타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비달을 제치고 아비달의 뒤에서 공을 올렸던 유일한 선수가 누구냐이다. 그 선수는 다름 아닌 '설기현'이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에서 박지성의 동점골은 조재진의 어시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재진의 어시스트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이전 상황은 바로 설기현이 아비달을 제치고 그 뒤로 돌아들어가 센터링을 올려준 것이었다.

 

사실 설기현의 플레이 스타일은 행인이 선호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이전 국대에서 보여준 설기현의 플레이는 움직이면서 공을 받기 보다는 상대 선수를 등진 채 자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공을 받는 형태가 대부분이었고, 패스받은 공을 바로 치고 들어가기보다는 한 두번 꺾은 다음에 진로를 잡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경기스타일은 사람마다 그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설기현의 그런 플레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행인의 취향에는 별로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는데, 아비달을 제치고 센터링을 올리던 설기현의 플레이는 행인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2006-2007시즌부터 설기현은 레딩FC 소속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레딩은 1871년 창단된 후 135년만인 이번 시즌에 처음으로 1부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팀이다. 2부 리그인 챔피언십에서 지난 시즌 31승 13무 2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거두고 1부리그로 진출한 레딩은 애초 수비를 보강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이적료와 연봉 150만 파운드를 들여 설기현을 영입했다.

 

이번 시즌부터 멘U에서 뛰는 마이클 캐릭의 경우 우리 돈으로 거의 300억이라는 이적료를 지불하고 토트넘에서 빼온 것을 비교하면 설기현의 경우는 매우 값 싸게 데려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레딩이라는 팀의 현재 상황을 보면 설기현의 몸값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설기현의 몸값은 현재 레딩 안에서 뿐만 아니라 레딩 역사상 가장 많은 금액이다.

 

2000년 벨기에 진출 이후 장장 6년 간 설기현은 유럽축구를 몸으로 배워왔다. 히딩크가 버티고 있던 아인트호벤에서 박지성과 이영표가 바람몰이를 하고, 그러다가 둘이 거의 동시에 프리미어로 진출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설기현은 이들 두 프리미어리거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진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설기현은 시즌 개막전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루었고, 오늘 새벽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도 자로 잰듯한 센터링으로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프리미어리그 진출 첫 경기에서 9점이라는 최고평점을 받은 설기현은 오늘 새벽 경기에서도 8점이라는 레딩 선수 중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다.

 

심판의 과도한 판정으로 한 선수가 퇴장당한 상태에서 레딩은 결국 3:1로 패배했지만 그 와중에도 설기현의 플레이는 매우 돋보일 정도였다.

 

올 가을과 겨울엔 지난 시즌보다 더 많은 밤을 새울 모양이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의 경기를 보고 싶으니까.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선수들이 잘 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덕분에 프리미어 축구를 더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기분 좋은 일이다.

 

그나저나 올해는 시간 조정 좀 해서 K리그 보러 다닐 수 있어야 할텐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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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4 13:52 2006/08/24 1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