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쉬던 중에...

고모 중의 한 분이 참 극성스런 성격을 가졌다. 이분, 하나 뿐인 아들내미가 군대를 가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번은 한 겨울에 고모집에 일이 있어 갔더니 집구석이 바깥보다 더 추웠다. 한기가 풀풀 도는데 이거 뭔 일이 있나 싶었다. 해서 봤더니 이 극성스러운 고모께서 당신 아들은 군대 가서 이 겨울에 생 고생을 할텐데 당신은 뜨신 방에서 있을 수 없다고 아예 보일러를 끄고 살았던 거다.

 

어이가 없어진 행인, 바로 보일러 틀고 난리 버거지를 피웠다. 지금 그녀석 뜨신 내무반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성화를 내면서.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식 군대보낸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되었다. 물론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극성이 어디 가겠냐만서도...

 

점심 먹고 잠시 쉬는 동안 기사검색을 하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무분규를 선언한 현중 노조에 감사와 격려의 편지가 답지했다는 기사였다. 기사의 주 내용은 아들이 전투경찰로 있는 한 어머니가 분규를 하지 않겠다는 현중 노조에 절절한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는 거다.

 

울 고모의 사례가 떠오른 것은 이때문이다. 그 어머니의 심정, 아마도 울 고모의 그때 그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허구헌 날 집회시위진압으로 몸이 성치 않을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그거 보통 예사롭지 않을 것임은 쉽게 짐작이 간다. 오죽하면 노조에 감사편지까지 보냈을까...

 

그런데, 행인의 마음을 갑갑하게 했던 것은 이 편지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편지에 대해 현중 노조위원장이 한 이야기.

 

"각계의 격려에 기쁘기도 하지만 더욱 큰 책임감을 느낀다. 앞으로도 노사화합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

 

편지를 보낸 그 어머니는 "민노총 탈퇴 후 납부해오던 분담금도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활동에 사용하는 걸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덕담을 했단다. 이러한 덕담에 대해 위원장은 "책임감"을 느끼면서 "노사화합"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현중노조는 민주노총을 "탈퇴"한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으로부터 "제명" 당한 거다. 2004년 9월 15일 민주노총 금속연맹은 현대중공업 노조의 제명을 투표자 89.7%의 찬성으로 통과시킨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제명당한 이유는 그들의 반노동자적 반인권적 행동 때문이었다. 2004년 3월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직원이었던 박일수씨는 현대중공업의 부당한 하청구조와 노동착취에 대한 저항 끝에 분신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중공업 노조는 마치 사용자인양, 아니 그보다도 "민주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의 이념을 저버린 채 영안실에 난입하고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등의 행동을 했다.

 

당시 상황으로 보자면 금속연맹의 현중 제명은 오히려 눈치를 보다가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 당도 마찬가지여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러한 비상식적 행위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의 분노, 특히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단계에 이르자 현중 노조를 제명하는 선에서 일단락을 지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현중노조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일체 반성하거나 하지 않고 함구하고 있으며, 비정규 하청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노동자로서의 연대나 투쟁을 방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자본과 언론에 의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노동자 집단으로 미화되고 포장되고 있다.

 

현중 노조위원장이 느낀다는 그 "큰 책임감"은 실체가 뭘까? 다른 노동자들이야 어떻게 되던 말던 자신들의 직장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는 것일까? 그가 이야기하는 "노사화합"의 실체는 뭘까?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야 분신을 하건 말건, 자신들과 사업주 간의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만 유지할 수 있으면 된다는 이야길까?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는 오늘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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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3 15:38 2006/08/23 1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