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루주... 달콤 쌉싸름한...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가을...

그해 시골집 장독대 옆 김장독 묻는 초막 안에는 김치독 말고 또 하나의 독이 묻혀있었다.

잔치에 쓴다고 담궈둔 머루주... 독이었다. 술독이라는 이야기다.

머루가 독 안에 반 넘어 들어가 있었던 진짜 머루주였다.

그 맛이라는 것은 사실 포도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새참에 내오는 막걸리나 쬐끔씩 핥짝거리던 행인에게 이 독은 언젠가 정복해야할 목표물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잔치에 쓴다고 봉인을 해둔 터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표시가 금방 나게 되어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참일 때였다.

마침 집안 식구들은 모두 일나간다고 들로 산으로 가 있는 상황이었고, 행인 혼자 빈 집을 지키고 있었다. 깡촌이라서 군것질 거리도 없는 살림인지라, 뭐 먹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부엌이고 광이고 어디에도 9살짜리가 거둬 먹을만한 것은 없었다.

이러구러 점심나절도 지나고 한참 볕이 따끈거릴 때였다.

문득 행인의 머릿속에는 뭔가 뒤뜨락에 가면 재밌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흐흐흐... 뒤뜨락 초막 안에 묻혀 있는 독들을 바라보고 있는 행인이었다.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뚜껑 옆을 봉인해버린 그 문제의 독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단단히 봉해져 있는 독이었건만 왠지 머루 냄새가 살살 풍겨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루주가 행인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퍼 마셔야 한다. 그것이 오늘 내게 주어진 미션이다... 간곡한 소명감마저 느끼는 행인이었다.

결단은 빠를 수록 좋다.

부엌으로 들어간 행인은 대접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대접 두 개를 들고 뒤 뜨락으로 돌아가서는 우선 총각김치가 담겨 있는 독을 열고 대접 가득히 총각김치를 담았다. 안주거리 장만~~!!

이제 술독을 뜯을 차례다.

남은 대접으로 밀가루 봉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두드리자 밀가루 봉인이 뜯겨 나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놋대접도 찌그러졌다. 밀가루 봉인을 뜯어낸 다음 독 뚜껑을 들었다.

상큼하고 달큰한 향내가 코를 찔렀다. 그 향내 아래로 간장보다 새카만, 하지만 묘한 광채가 나는 머루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아, 그 수면에 비친 행인의 얼굴이란 또 얼마나 선명했는지...

찌그러진 놋대접을 독 안으로 들이 밀어 넣고 한 대접 듬뿍 머루주를 퍼냈다.

오호... 이 향기... 나중에 벼락이 떨어져도 이걸 마시지 않는다면야 어찌 싸나이랄 수 있겠는가... 쥐톨만한 싸나이가 드뎌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한 대접 쭈~~욱 들이키는 그 순간, 그 기분이 어땠는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암튼 기가막힌 기분이었음은 분명하다. "캬~~~"하는 탄성을 내지른 행인, 총각김치 한 쪽을 손으로 들고 우적 우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잘 익은 총각김치 뿌리에서는 사이다 맛이 났다. 사이다... 이게 뭐 어디 함부로 먹어볼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 맛이 나는 김치... 쩝... 배고프다.

한 잔은 또 한 잔을 부르고, 또 한 잔은 다른 한 잔을 부른다.

총각김치 한 뿌리는 또 한 뿌리를 부르고, 그 한 뿌리는 또 다른 한 뿌리를 부른다.

술은 총각김치를 부르고 총각김치는 술을 불렀다.

이렇게 한 잔 두 잔 퍼마시다가 결국 행인은 졸도를 하고야 말았다.

원래는 두어잔 퍼마신 후 뚜껑을 덮고 부엌에 있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처음과 똑같이 위장을 해놓으려는 것이 행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무슨 얼어죽을 계획.

몇 잔을 퍼마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꽤나 퍼마셔대다가 그냥 꼴까닥 넘어간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았더니 밤이다.

할무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이고, 이제야 정신이 드는겨?"

아, 그러나 어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지게 작대기에 다리몽댕이가 분질러질 우려가 있는데... 끙끙 거리면서 계속 앓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점심 때 조금 지나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밤이 되었으니 몇 시간을 잤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도 잠시, 그렇게 비비적 거리다가 또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할어버지에게 된통 쿠사리를 맞아야 했다. 사촌 형들에게도 엄청 얻어맞았고, 할무이와 큰엄니에게 마구 꼬집혔다. 그러나 그러한 물리적 고통보다도 더욱 행인을 충격의 도가니탕으로 끓게 만들었던 사실은 내가 기절해있었던 시간이 겨우 반나절이 아니라 꼬박 하루+반나절이었다는 것이었다. 즉, 중간에 정신을 차렸을 때의 그 밤은 기절했던 날의 그 밤이 아니라 그 다음날의 밤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머리 큰 다음에도 어디 머루주 있다는 소리 들으면 냉큼 달려가서 맛을 봤지만 하루 넘게 행인을 기절시켰던 어릴 적 그 머루주의 맛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물론 술을 끊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 맛을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아깝다...